조선 태조 5년, 병자년(丙子年), 1396년

조선 태조 5년, 병자년(丙子年), 1396년

1월 4일

• 임금이 도성 터를 살펴봄.

1월 9일

• 경상 · 전라 · 강원도와 서북면 안주(安州) 이남과 동북면 함주(咸州) 이남의 민정 11만 8,070여 명을 징발하여 처음 도성을 쌓게 함. 백악 동쪽에서 천(天)자로 시작하여 백악 서쪽으로 조(弔)자로 그치게 함. 길이는 5만 9,500척이요, 600척마다 한 자호(一字號)를 붙여 모두 97구간이 됨. 한 글자마다 6호(六號)로 나누고 2자 마다 감역판사(監役判事) · 부판사 각 1인씩 두고, 사(使) · 부사 · 판관 12인 중에서 각도 주군의 민호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天)자에서 일(日)자까지는 동북면, 월(月)자에서 한(寒)자까지는 강원도, 내(來)자에서 진(珍)자까지는 경상도, 이(李)자에서 용(龍)자까지는 전라도, 사(師)자에서 조(弔)자까지는 서북면이 담당하게 함. 역사를 감독하는 사람이 밤낮없이 시키니, 임금이 날씨가 춥다고 하여 밤의 역사는 못하게 함.

• 백악신(白岳神)과 오방신(五方神)에게 도성 축조를 고하는 제사를 올림.

1월 10일

• 경기 좌 · 우도 인부 200명을 징발하여 소격전(昭格殿)을 경영하게 함.

1월 14일

• 임금이 성 쌓는 역사를 살펴봄.

1월 17일

• 승도 20명을 내전에 모으고 소재대반야도량(消災大般若道場)을 베풂.

1월 20일

• 원종공신(原從功臣)들의 녹권을 하사함.

• 내신을 성 쌓는 곳에 보내 “바람 불고 눈 내리는 날은 역사를 시키지 말라”고 유시함.

1월 24일

• 임금이 화공(畵工)으로 하여금 부처를 그리게 하여 새 궁궐에 안치하고 부처를 섬김.

2월 5일

• 크게 바람이 불고 진눈깨비가 오고 금천교(錦川橋)의 80여 호가 불에 탐.

2월 15일

• 새 도읍에 역사하러 온 사람들을 농사짓기 위해 돌려보냄.

2월 22일

• 임금이 연3일 동안 도성 쌓는 일을 살펴봄.

2월 27일

• 성문 밖 세 곳에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 역부(役夫)로서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하게 하고, 그 집도 3년간 복호(復戶)하도록 함.

2월 28일

• 49일간의 1차 도성축조를 완료하고 성 쌓는 인부를 돌려보냄.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을 쌓았는데 높이는 15척, 길이는 1만 9,200척이었고, 평탄한 산에는 토성을 쌓았는데 아래 너비는 24척, 위는 18척, 높이는 25척, 길이는 4만 300척임.

3월 4일

• 축성감독 경외관(築城監督京外官)에게 잔치를 베풂.

• 자은(慈恩) 도승통(都僧統) 종림(宗林)이 윤안정(尹安鼎)과 함께 판교원(板橋院)을 짓고 성 쌓는 사람에게 병을 구료하고 음식도 공급하니, 김사형이 듣고 임금께 아뢰어 미두(米豆)와 염장(鹽醬)을 하사하게 함.

• 성을 쌓는데 동원된 진원군(珍原郡) 백성의 딸 도리장(都里莊)의 효성에 조정에서 면포를 하사함.

3월 16일

• 임금이 전라도 사람들이 성 쌓는 역사에 왔다가 병들어 죽은 자가 더욱 많다는 것을 듣고, 그 집에 미두(米豆)를 하사하도록 함.

4월 6일

• 임금이 광주를 지나가다 수릉(壽陵) 자리를 살핌.

4월 10일

• 날씨가 오래 가물어 금주(禁酒)하게 함.

4월 13일

• 간관(諫官)이 오랜 가뭄에 관한 대책을 상언함. 토목의 역사를 정지할 것, 성 쌓는 역사에서 병들어 죽은 사람은 그 집을 복호할 것, 중외의 지체된 옥사를 살펴 해당 관리들을 징계할 것 등.

4월 14일

• 중외의 2죄 이하의 죄수를 석방함.

4월 17일

• 가뭄으로 인하여 시전(市廛)을 옮김.

• 내시를 보내 경기 일대의 큰 우물, 큰 연못 등에 제(祭)를 지내고, 사찰 등에 재(齋)를 올려 비를 빌게 함.

4월 19일

• 한성부의 오부 방명표(坊名標)를 세움.

• 동부 12방(坊) : 연희(燕喜) 숭교(崇敎) 천달(泉達) 창선(彰善) 건덕(建德) 덕성(德成) 서운(瑞雲) 연화(蓮花) 숭신(崇信) 인창(仁昌) 관덕(觀德) 흥성(興盛).

• 남부 11방 : 광통(廣通) 호현(好賢) 명례(明禮) 대평(大平) 훈도(熏陶) 성명(誠明) 낙선(樂善) 정심(貞心) 명철(明哲) 성신(誠身) 예성(禮成).

• 서부 11방 : 영견(永堅) 인달(仁達) 적선(積善) 여경(餘慶) 인지(仁智) 황화(皇華) 취현(聚賢) 양생(養生) 신화(神化) 반석(盤石) 반송(盤松).

• 북부 10방 : 광화(廣化) 양덕(陽德) 가회(嘉會) 안국(安國) 관광(觀光) 진정(鎭定) 순화(順化) 명통(明通) 준수(俊秀) 의통(義通).

• 중부 8방 : 정선(貞善) 경행(慶幸) 관인(寬仁) 수진(壽進) 징청(澄淸) 장통(長通) 서린(瑞麟) 견평(堅平).

4월 29일

• 중 800명을 근정전에 모으고 금강경(金剛經)을 외우게 함.

5월 1일

• 임금이 근정정에서 고시관 조준과 정도전이 뽑은 33명을 시험 보이고, 김익정을 1등으로 삼음.

5월 6일

• 생원시(生員試)의 100명 선출 방안을 결정함.

5월 8일

• 이빈(李彬)이 축성제조(築城提調)로 있으면서 역사를 소홀히 했음을 이유로 전민(田民)을 몰수하고 영해부(寧海府)에 귀양 보냄.

5월 12일

• 새로 주조한 종(鐘)이 완성됨.

6월 1일

• 임금이 근정전에서 이수(李隨) 등 99명의 생원을 방방(放榜)함.

6월 2일

• 성을 쌓은 것이 부실하여 축성제조 이성중(李誠中)을 순군옥에 가둠.

• 임금이 대시(大市)에 거둥하여 새로 만든 종을 보고, 4 · 5차례 시험 삼아 치니 종이 깨어져 다시 만들게 함.

6월 9일

• 남녀 황색복(黃色服)과 말을 탈 때 고들개를 드리우는 것을 금함.

6월 11일

• 중국 사신 우우(牛牛) 일행이 오니 임금이 반송정(盤松亭)에서 맞아들임.

• 백관으로 하여금 항상 사모를 쓰고 매일 궐문에 모여 시위(侍衛)하게 함.

6월 13일

• 중국 황제가 국가를 인정하였으므로 친히 종묘에 고함.

• 도성을 부실하게 쌓아 순군옥에 갇혔던 이성중(李誠中)을 석방함.

6월 17일

• 금주령을 해제함.

7월 1일

• 현비(顯妃, 신덕왕후)가 미령하여 중 등 50명을 모아 내전에서 부처에게 쾌유를 빌게 함.

7월 3일

• 밤에 폭풍우가 있어 도성 수구(水口)의 옹성(甕城) 1칸이 무너짐.

7월 5일

•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도성 수구의 옹성 1칸이 또 무너짐.

7월 7일

• 현비의 쾌유를 위해 중들을 내전에 모아서 부처에게 빌고, 사신을 회암사(檜巖寺)에 보내 빌게 하였고, 또 소격전(昭格殿)에 초제(醮祭)를 거행하게 하였으며, 중외의 2죄 이하의 죄수를 석방함.

7월 11일

• 간관이 성 쌓는 역사를 중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꾸짖음.

7월 12일

• 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가 세상을 떠남.

7월 14일

• 임금이 태평관에 가서 사신을 만나봄.

7월 19일

• 중국 사신 송발라(宋孛羅)가 먼저 남경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반송정에서 전별하고, 한성부윤 하륜(河崙)으로 계품사(啓稟使)를 삼아서 황제에게 새해 축하 표문과 상전문의 경솔함에 대한 시말을 주달함.

7월 21일

• 임금이 도평의사사에게 명하여 각도의 군인들을 징발하여 도성 축조공사를 마치게 하고, 그 가부를 물으니 대신들이 일찍 가뭄이 들고 늦게 홍수 든 데다가 누리로 인한 재해가 있어 곡식이 잘 안된 이유로 불가하다고 함.

7월 24일

• 명나라 사신 우우(牛牛) 등이 한강에 나가서 놀음.

8월 4일

• 명나라 사신 우우 등이 영서역(迎曙驛)에서 매사냥 하는 것을 구경함.

8월 6일

• 경상 · 전라 · 강원도에서 축성인부 7만 9,400명을 징발함.

8월 8일

• 세마지(洗馬池)를 사복시 서편에 파게 함.

8월 9일

• 현비(신덕왕후)가 위독하여 이득분(李得芬)의 집으로 피하여 거처하게 함.

8월 13일

• 현비가 이득분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조회와 저자를 10일간 정지함.

8월 14일

• 예조에 행상(行喪)하는 예(禮)를 상정하게 하고, 구궁(舊宮)으로 빈소를 옮김.

8월 17일

• 금주와 매사냥 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을 내림.

8월 23일

• 임금이 취현방(聚賢坊)에 거둥하여 현비의 능지를 보아 결정함. 앞서 임금은 안암동 · 행주 등지를 능지로 살폈으나 이에 이르러 취현방으로 결정함.

9월 1일

• 천변지괴(天變地怪)가 여러 번 났으므로 백악산에 제사지내게 하고, 사람을 절에 보내 소재법석(消災法席)을 베풀게 함.

9월 9일

• 임금이 도성의 역사를 시찰하고 감독관에게 술을 내려줌.

9월 15일

• 임금이 의위(儀衛)를 갖추고 경복궁으로 옮김.

9월 24일

• (제2차) 도성 쌓는 일을 마치고 정부(丁夫)를 돌려보냄.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으로 쌓고 간간이 토성으로 쌓음. 각 문에 월단누합(月團樓閤)을 만듬. 정북은 숙청문(肅淸門), 동북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 정동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 동남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 정남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 약간 북쪽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 정서는 돈의문(敦義門), 서북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함.

9월 28일

• 봉상시에서 현비의 존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능호를 ‘정릉(貞陵)’이라 의논하여 올림.

• 전라도 인부들이 수릉(壽陵)의 개석(蓋石)을 운반하다 다친 자가 89명에 이름.

10월 1일

• 도성제조 권화(權和) · 박자안(朴子安) · 신유현(辛有賢)에게 내구마 각 1필씩을 하사함.

10월 2일

• 임금이 거둥하여 성 쌓는 일을 살펴봄.

10월 5일

• 백관에게 아일(衙日, 근무일) 조회는 5경(更) 4점(點)에, 대조회는 5경 1점에 모두 대궐문에 모이게 함.

10월 14일

• 각도 주군의 땅으로 개 어금니 같이 서로 들어간 것(犬牙相入者)은 경계를 다시 정함.

11월 8일

• 임금이 태평관에 나아가 명나라 사신 우우(牛牛) 등을 접대하였는데, 임금이 처음으로 고기반찬을 먹음.

11월 9일

• 우우 등이 궁궐에 들어와 사례함.

11월 19일

• 태평관에 거둥하여 돌아가는 명나라 사신을 연회하고, 곧 수릉(壽陵)에 감.

11월 23일

• 한성윤 조익수(曺益修), 삼사우복야 권화(權和), 상의중추원부사(商議中樞院副使) 장사정(張思靖)을 강원도로 보내 왜구를 방비하게 함.

• 모든 관리들이 상복을 벗음.

11월 30일

•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강무제도(講武制度)를 올림.

12월 2일

• 임금이 흥천사(興天寺)에 거둥하여 공장(工匠)들에게 음식을 줌.

12월 3일

• 김사형(金士衡) 등이 일기도(一歧島) ·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기 위해 떠나니, 남대문 밖에서 전송함. 도당에서는 한강에 나가 전송연을 베풂.

• 한성윤 민개(閔開)가 세상을 떠남.

12월 7일

• 임금이 종루(鐘樓)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한 종을 살펴봄.

12월 24일

• 수릉에 거둥함.

이해

•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를 설치함.

• 무학대사가 안암산 기슭에 영도사(永導寺)를 창건하였는데, 정조 3년(1779)에 개운사(開運寺, 성북구 안암동)로 개칭함.

• 사자암(獅子庵, 동작구 상도동)을 창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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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1301년
신사년(辛巳年), 14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