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4년, 을해년(乙亥年), 1395년

조선 태조 4년, 을해년(乙亥年), 1395년

1월 11일

• 수로전운소 완호별감(水路轉運所完護別監)을 두고, 용산강에서 충주의 연천(淵遷)까지 7개소에 각각 30호씩 예속시킴.

1월 14일

• 개성부에서 신도의 각 품 집터를 다시 정하여 정1품이 35부(負), 이하 한 품에 5부씩 내려 6품은 10부, 서민은 2부씩 나누어 주게 하였는데, 지금 신도의 면적이 500여 결밖에 되지 않아 최고 30 · 40부를 넘지 않게 하는 것으로 조정함.

1월 25일

• 정도전과 정총 등이 고려 태조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37권의 《고려사》를 편찬하여 바침.

1월 29일

• 사직단의 영건(營建) 공사를 시작함.

2월 1일

• 궁궐공사에 부역 중인 역승(役僧) 50명을 돌려보냄. 개국 2등공신 조기(趙琦)가 병이 나 부처에게 기도하기 위함.

2월 2일

• 삼군부와 병조에 명하여 각 영(領)의 장군(將軍) · 오원(五員) · 십장(十將) 등을 임용하여 각도 도통사(都統使)와 절제사(節制使)로 하여금 그 도의 판사 이하로 무략(武略)있는 자를 5명씩 뽑아 올리게 하고 그 중에서 뽑아 쓰도록 함.

2월 13일

•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처음으로 겸공봉(兼供奉) 2명, 겸수찬(兼修撰) 2명, 겸직관(兼直館) 4명을 둠. 혜민국(惠民局)에는 영(令) 2명을 7품, 승(丞) 2명을 8품으로 함.

• 서반(西班)의 관제를 개정함. 의흥친군좌위(義興親軍左衛)를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우위(右衛)를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 응양위(鷹揚衛)를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 금오위(金吾衛)를 신무시위사(神武侍衛司), 좌우위(左右衛)를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 신호위(神虎衛)를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 흥위위(興威衛)를 용무순위사(龍武巡衛司), 비순위(備巡衛)를 호분순위사(虎賁巡衛司), 천우위(千牛衛)를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 감문위(監門衛)를 호용순위사(虎勇巡衛司)로 고침.

• 육조의 주사(主事)를 폐지함.

2월 19일

• 궁궐을 조성하는 각도의 정부(丁夫)를 돌려보내고 승도(僧徒)들로 대신하게 함. 백성들의 농사철 대비와 승려의 유휴 노동력 동원을 건의한 박경(朴經) 등의 상서를 윤허한 것임.

2월 24일

• 서울과 지방의 감옥이 더럽고 수리하지 않아, 무더위와 모진 추위에 병들고 비명에 죽게 되는 천변(天變)이 있자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모두 석방함.

• 사직단의 공사가 있음.

• 임금이 고려 왕씨를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봄 · 가을로 항상 거행하게 함.

2월 27일

• 임금이 서봉(西峰, 인왕산) 밑에 거둥하여 사직단 축조공사를 살핌.

3월 1일

• 응방(鷹坊)을 한강 위(성동구 응봉 기슭)에 설치함.

3월 4일

• 임금이 과주(果州, 과천)에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물색함. 돌아오는 길에 두모포(豆毛浦) 배 위에서 연회를 베풀고, 왕심촌(往尋村, 왕십리)에서 노루사냥을 하고자 하였으나 그만둠.

3월 23일

• 임금이 평주 온천에 가는 길에 개성에 이름.

3월 24일

• 정혼(鄭渾)을 경기좌도와 충청도에 보내 병선(兵船)의 허실과 장수 · 군사들의 능력을 점고하게 함.

4월 1일

• 삼군부로 하여금 와 를 간행하도록 함.

4월 21일

• 사노(私奴) 최문(崔文)과 오천수(吳天壽) 등이 왕지(王旨)를 위조하였으므로 모두 참형에 처하여 기시(棄市) 함.

• 예문춘추관 태학사 이염이 말을 타고 궁성에 들어오자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됨.

4월 22일

• 임금이 반송정(盤松亭)에서 활쏘기를 사열하고, 다시 용산에 거둥하여 방목장(放牧場)을 살펴봄.

4월 23일

• 임금이 태묘 건축공사를 보고, 한강의 응방(鷹坊)에 거둥함.

4월 25일

• 술 마시는 것을 제한함. 종묘의 제사, 임금과 신하의 연회, 사신의 영송(迎送) 이외에는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여럿이 모여서 함부로 술 마시는 것을 금하여 사무를 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공상(工商) · 천례(賤隸)들도 떼를 지어 술 마시는 것을 금하여 본성을 잃고 재화를 부르는 원인을 제거하고,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크게 징계하는 것을 영구한 법으로 삼음.

4월 28일

• 무예의 도시(都試)를 보여 33명을 뽑음.

5월 27일

• 임금이 태묘의 건축공사를 보고, 한강의 응방에 거둥함.

6월 6일

•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한양부의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침. 한성부 관원은 고려의 개성부제에 의거 판부사(判府事) · 부윤(府尹) · 소윤(小尹) · 판관(判官) · 참군(參軍)의 직제에 따름.

• 정도전이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찬하여 바침.

6월 13일

• 판한성부사에 성석린(成石璘), 한성부윤에 정신의(鄭臣義)를 임명함. 개성부를 개성유후사, 양광도를 충청도, 서해도를 풍해도,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로 개편함.

6월 14일

• 현비(顯妃)의 생일로 서울과 지방의 2죄 이하의 죄수를 석방함.

6월 28일

• 궁궐조성 감역관과 인부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함.

7월 3일

• 폭풍과 번개가 치고 비가 와서 새 대궐 동쪽 월랑(月廊) 48칸이 무너짐.

7월 9일

• 명나라 제도에 의한 제복(祭服)의 등급을 밝히는 영(令)을 내림.

7월 11일

• 정도전 · 남재 · 남은 · 이직으로 하여금 광주(廣州)에 가서 수릉을 살피게 함.

7월 12일

• 임금이 현비(顯妃)가 편안치 못하여 중을 시켜 부처에게 기도하게 하고, 중외(中外)의 2죄 이하의 죄수는 석방하게 함.

7월 13일

• 장생전(長生殿)을 궁궐 서쪽에 세우라 명함. 공신들의 도상(圖像)을 걸기 위한 것으로 여러 공신들이 돈과 곡식을 차등 있게 내어 비용을 도움.

7월 26일

• 각도로 하여금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을 방문하여 존비를 막론하고 쌀 2곡(斛)씩 하사함.

7월 27일

• 종묘에 거둥하여 건축하는 것을 살핌.

7월 30일

• 각도의 기민을 구휼함.

• 광주와 천녕(川寧) 사이에서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쳤으므로, 그 토지의 세곡을 면제하고 집집마다 쌀과 서속(黍粟)을 주게 함.

8월 8일

• 훈련관에 명하여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군관 등을 모아 각종 병서를 강습하도록 함.

• 함부림(咸傅霖)을 강원도에 보내 장생전의 재목을 감독하게 함.

8월 12일

• 경기좌도 정부(丁夫) 4,500명, 우도 5,000명, 충청도 5,500명을 징발하여 궁궐 역사(役事)에 부역하게 함.

8월 28일

• 백악산(白岳山, 북악산) 제단에 제사를 올림.

9월 5일

• 동산(東山)을 봉하여 호국신(護國神)을 삼음.

9월 15일

• 새 대궐에 부역하는 정부를 놓아 보내고, 승도들만 머물게 함. 가을에 다시 모아들일 계획.

9월 17일

• 충청도와 풍해좌 · 우도의 정부 1,200명을 징발하여 강화도에 보내 석회를 굽게 함.

9월 22일

• 정도전에게 명하여 새 대궐의 침실 사면 벽 위에 본받을 만하고 경계될 만한 교훈을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있는 좋은 말들을 모아서 올리라고 함.

9월 26일

• 명년(1396) 정월에 여러 도의 백성을 징발하여 도성(都城)을 쌓고자 하는 뜻을 밝힘.

9월 28일

• 안암동(安菴洞)에 거둥하여 수릉 터를 살피고, 주종소(鑄鐘所)에 거둥함.

9월 29일

• 개국공신에게 각각 내구마 한 필씩을 하사함.

• 새 대궐 후원에 연못을 팜.

• 김영열(金英烈)이 잡은 왜구를 성동(城東)에서 참형함.

이달

• 대묘(大廟)와 새 궁궐이 준공됨.

• 대묘의 대실(大室)은 7칸으로 동당이실(同堂異室) 형태. 안에 석실(石室) 5칸을 만들고 좌우의 익랑(翼廊)은 각각 2칸, 공신당(功臣堂)은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빙둘러 담장을 쌓고 신주(神廚) 7칸, 향관청(享官廳) 5칸, 좌우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齋宮) 5칸.

• 새 궁궐은 연침(燕寢) 7칸, 동서 이방(耳房)이 각각 2칸, 북쪽으로 뚫린 행랑 7칸, 북쪽 행랑 25칸,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칸,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칸, 남쪽으로 뚫린 행랑 5칸, 동쪽 소침(小寢) 3칸, 통하는 행랑 7칸은 연침의 남쪽에 있는 행랑에 닿았고, 또 통하는 행랑 5칸은 연침의 동쪽 행랑에 닿았으며, 서쪽 소침 3칸과 통하는 행랑 7칸은 연침의 남쪽 통하는 행랑에 닿았음. 또 통하는 행랑 5칸은 연침의 서쪽 행랑에 닿았고, 보평청(報平廳) 5칸은 정사를 보는 곳으로 연침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이방이 각각 1칸씩이며, 남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7칸, 동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15칸. 처음 남쪽으로 통하는 행랑 5칸이 동쪽 행랑에 닿았고, 서쪽으로 통하는 행랑 15칸도 역시 남쪽 행랑 5칸에서 서쪽 행랑에 닿았고, 연침 북쪽 행랑 동쪽 구석에서 정전(正殿)에 그치고, 북쪽 행랑의 동쪽 23칸이 동쪽 행랑, 서루(西樓)에서 정전까지 가는 북쪽 행랑 서쪽 20칸이 서쪽 행랑이 되니, 이상이 내전과 정전임. 5칸의 조회 받는 곳은 보평청 남쪽에 있는데, 상 · 하층의 월대가 있어서 들어가는 깊이가 50척, 너비가 112척 5촌, 동계 · 서계 · 북계의 너비가 각각 15척임. 윗층계의 높이 4척, 석교(石橋) 5층, 중계(中階)의 사면 너비가 각각 15척, 아래층의 높이 4척, 석교 5층임. 북쪽 행랑 29칸을 통하는 행랑은 북행랑에서 정전의 북쪽에 닿았고, 수라간(水刺間) 4칸과 동루(東樓) 3칸은 상하층이 있음. 그 북쪽 행랑 19칸은 정전의 북쪽 행랑 동쪽에 닿아서 내전의 동쪽 행랑과 연하였고, 그 남쪽 9칸은 전문(殿門)의 동각루(東角樓)에 닿았음. 서루 3칸도 상하층이 있는데, 그 북쪽 행랑 19칸은 정전의 북쪽 행랑 서쪽 구석에 닿아서 내전의 서쪽 행랑과 연하고, 그 남쪽 9칸은 전문의 서각루 전정(殿庭)에 닿았음. 너비는 동서가 각각 80척, 남쪽이 178척, 북쪽이 43척이며, 전문 3칸은 전의 남쪽에 있고, 좌우행랑 각각 11칸과 동 · 서 각루 각각 2칸과 오문(午門) 3칸은 전문의 남쪽에 있음. 동서행랑은 각각 17칸이며, 수각(水閣)이 3칸, 뜰 가운데 석교가 있으니 도랑물이 흐름. 문의 좌우행랑이 각각 17칸이며, 동 · 서 각루가 각각 2칸씩임. 동문을 일화문(日華門), 서문을 월화문(月華門)이라 함. 이 밖에 주방(廚房), 등촉방(燈燭房), 인자방(引者房), 상의원(尙衣院), 양전(兩殿)의 사옹방(司饔房), 상서사(尙書司), 승지방(承旨房), 내시다방(內侍茶房), 경흥부(敬興府), 중추원(中樞院), 삼군부(三軍府), 동 · 서루고(東西樓庫)가 390여 칸임.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 서문은 영추문(迎秋門),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 3칸이 상 · 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하였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 삼군부 · 육조 · 사헌부 등의 각사 관아가 벌여 있음.

윤9월 1일

• 종묘이안도감(宗廟移安都監)을 설치함.

• 대묘의 동역제조관(董役提調官)에게 잔치를 내려주고 내구마 한 필씩을 하사함.

윤9월 10일

• 임금이 도성 쌓을 자리를 돌아봄.

• 임금이 동교에 거둥하여 매사냥을 구경함.

윤9월 13일

•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함. 판사 · 부판사 · 사 · 부사 · 판관 · 녹사들을 임명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함.

윤9월 19일

• 여러 도의 정부(丁夫) 1천명을 징발하여 태평관(太平館)을 짓게 함.

윤9월 25일

• 서산(西山)에 거둥하여 성 쌓을 자리를 살핌.

윤9월 26일

• 권근(權近)을 개성유후사에 보내 종묘의 이안(移安)을 고유(告由)하게 함.

• 각사(各司)에서 1명씩 보내 유후사에 가서 4대(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의 신주를 봉안하여 오게 함.

윤9월 27일

• 임금이 새 대궐에서 재계(齋戒)함. 종묘제헌관(宗廟祭獻官) 김사형(金士衡)과 여러 집사들이 삼사(三司)에 모여 맹세하는 모임을 갖고 각 관청에 돌아가 재계함.

윤9월 28일

• 백관이 공복을 갖추어 입고 반송정(盤松亭)에 나아가 신주를 맞이함. 상로(象輅)에 모시어 의장과 풍악을 잡히고 새 종묘에 안치함. 판문하부사 권중화에게 명하여 이안제(移安祭)를 행하게 함.

10월 4일

•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묘의 동문에 이르러 4배례를 행하고 재소(齋所)에 들어감.

10월 5일

• 임금이 면복을 입고 종묘에 친히 제사하고 작헌례를 행하니, 세자가 아헌, 우정승 김사형이 종헌함. 제례를 마치고 궁궐로 돌아올 때 중외의 조하를 받음. 시가지에 이르자 성균박사가 태학생을 인솔하고 「천감미(天監美, 왕으로 수명한 것)」 「화산미(華山美, 도읍을 정한 것)」 「신묘미(新廟美, 종묘를 세우고 친제한 것)」 등 가요 3편을 올림. 운종가에서는 전악서의 여악들이 노래를 부르며 정재(呈才)를 드림. 오문(午門) 밖 임시 행차소에서 교서를 내려 죄인을 사면함.

10월 7일

• 종묘 제사의 집사관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을 한 계급씩 올려주었으며, 양부(兩府) 이상에게는 내구마 1필씩을 하사하고, 신궁(新宮)에서 군신에게 잔치를 베풂.

• 정도전이 새 궁궐의 전각(殿閣)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림. 새 궁궐은 경복궁(景福宮), 연침(燕寢)은 강녕전(康寧殿), 동쪽 소침(小寢)은 연생전(延生殿), 서쪽 소침은 경성전(慶成殿), 연침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 동루를 융문루(隆文樓), 서루를 융무루(隆武樓),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

10월 10일

• 한성윤 정신의(鄭臣義)가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감.

10월 13일

• 의안백 이화(李和)가 정안군(靖安君, 태종)을 청하여 서교(西郊)에 사냥 나감.

10월 25일

• 문묘의 경영을 명함.

• 임금이 왕자와 제군(諸君)에게 매를 기르지 말라고 함.

11월 10일

• 사헌부에서 지방수령의 치적 평가 조목에 대해 아룀.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사랑함, 형벌을 조심하고 군사를 다스림, 염철(鹽鐵)을 준비하고 성보(城堡)를 수축함, 자량(資糧)을 저축하고 세부(稅賦)를 경감함, 사냥을 금하고 향원(鄕愿)을 징계함, 조세를 받아들이고 뽕 · 삼베 · 왕골 · 닥나무 등을 가꾸게 하는 일 등.

• 임금이 종묘 삭제(朔祭)의 전물(奠物)이 박하다는 말을 듣고 사헌부로 하여금 상정관제조(詳定官提調)를 조사하고 파직시킴.

10월 16일

• 봉상시(奉常寺)에서 종묘의 악장에 따라 사직 · 원구단 · 문묘 제향의 악장도 개작함.

12월 7일

• 성균관과 교서관에 명하여 문묘의 역사를 감독하게 함.

• 과거식(科擧式)을 정함. 경서를 강(講)하는 것을 초장(初場)으로 삼고, 진사시를 파하고 생원시로 함.

12월 15일

•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설치함. 남재(南在) · 한상경(韓尙敬) · 김희선(金希善)을 판사로 삼음.

12월 28일

• 새 궁궐(경복궁)로 들어감.

12월 29일

• 백악(白岳)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을 삼아,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 올릴 수 없게 함.

이해

• 봉국사(奉國寺)를 창건함. 무학이 조선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기 위한 호국사찰로, 성북구 정릉동 63번지에 위치함.

•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석각본(石刻本)을 제작함.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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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1301년
신사년(辛巳年), 14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