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원년, 기해년(己亥年), 1419년

조선 세종 원년, 기해년(己亥年), 1419년

1월 6일

• 진상과 궐내 용품 및 관복 이외의 금 · 은 사용을 금함.

1월 8일

• 상왕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쓰고자 변계량에게 을 짓게 함.

1월 9일

• 황색에 가까운 색옷과 서민의 단령의(團領衣)를 금함.

1월 10일

• 수강궁(壽康宮)을 수리하는데 상번선군(上番船軍)을 부리기로 함.

1월 12일

• 영접사 한성판윤 권홍(權弘)이 중화(中和)에서 돌아와 명나라 사신이 말한 고명(誥命) 받는 절차를 전함.

1월 14일

• 청파 · 노원 두 역의 인구와 물산이 메마르고 쇠잔한데, 전달하는 문서는 가장 번거로워 각급 관청 상수(上守)를 없앰.

1월 16일

• 호조에서 금 · 은 그릇을 회수하고 가격을 계산하여 줌.

• 주홍색 비단으로 말안장을 꾸미는 것을 금함.

1월 26일

• 군사의 조회하는 의식을 다시 정함. 매달 초하루와 16일에 첫 번째 신호로 북이 울리면 해당 관청에서는 궁전 뜰에다 의장을 정렬함.

1월 27일

• 경기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함.

2월 1일

• 양녕대군이 도망하여 아차산에 올라가 하루를 보냄.

2월 7일

• 환과고독(鰥寡孤獨)과 기민(飢民) 파악을 위해 한성 안 오부 방리(坊里)의 인명 수를 조사하게 함.

2월 8일

• 이종선(李種善)을 한성부윤으로 삼음.

2월 11일

• 상왕이 동교에서 사냥을 하니, 임금이 우대언 이수(李隨) 등에게 명하여 주정소에 술을 올리게 함.

• 강회중(姜淮仲)을 한성부윤으로 삼고, 전 한성부윤 이종선을 인수부윤으로 삼음.

2월 12일

• 선공감으로 하여금 경연청을 새로 짓게 함.

2월 14일

• 동 · 서활인원(東西活人院)에 각각 녹관(祿官) 2명을 두되, 모두 소속 의원으로 정하도록 함.

2월 16일

• 사서(四書)에 통달한 후에 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함.

2월 21일

• 상왕(태종)과 노상왕(정종)이 동교에서 매사냥을 하는데 임금이 따라가 대산(臺山, 甑山이라고도 함)의 새 정자인 낙천정(樂天亭)을 낙성하고 잔치함. 박은에게 명하여 정자 이름을 짓게 하니, 《주역(周易)》계사(繫辭)편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의 구절에서 ‘낙천’이라 명함.

2월 22일

• 감로사(甘露寺)의 노비 100명을 대자암(大慈庵)에 주도록 함.

2월 23일

• 중대사나 공사 문안에 모년 모월 모일(某年某月某日)을 기록하도록 함.

2월 24일

• 응양위(鷹揚衛)를 파함.

2월 25일

• 상왕이 낙천정에 행차함.

• 판한성부사 권홍(權弘)이 기자(箕子)의 비석을 세울 것을 상소하니, 변계량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비석을 사우에 세우도록 함.

3월 1일

• 상왕이 낙천정에 거둥함.

3월 2일

• 사직단의 담을 수리함.

• 노원 · 청파역에 입거(入居)하는 역리(驛吏)들을 10월에 교대시키도록 함.

• 선공감에 빼앗긴 흥덕사(興德寺)의 노비 2명을 보충해 줌.

3월 3일

• 상왕이 노상왕을 모시고 동교에서 사냥하니, 임금도 따라가 잔치를 베풂.

3월 4일

• 모든 제사에 꿩을 쓰지 않도록 함.

• 임금이 거둥할 때 여러 신하들의 시위하는 순서를 정함. 어가 뒤에 제1운창패(第一運槍牌)-병조-승정원 비신상호군(備身上護軍)-호군-부책대호군(扶策大護軍)-내시행수-시신(侍臣)-제2운창패-각사(各司) 순.

• 광주는 서울에 가까워 사무가 복잡한데, 관노 · 관비가 적으니 관기(官妓)를 없애도록 함.

3월 6일

• 서울 안의 각 관청이 날마다 결재 맡기를 꺼려하니, 각 관청이 전곡을 출납할 때 육시(六寺) · 7감(七監)은 6품관 이상이, 각 창고는 7품관 이상이 결재와 개인(開印)을 담당케 하고 바로 대장에 올리게 함.

• 한성에서 과거에 응시한 자 70명 가운데 초장(初場)에 합격한 자는 43명으로 부족한 인원을 중 · 종장에 응시하게 함.

3월 7일

• 상왕이 낙천정에 거둥함.

3월 9일

• 고려시대의 풍속에 따라 각 종파의 승려가 거리에 다니면서 불경을 외움.

3월 10일

• 상왕이 노상왕과 철원 등에서 강무하는데 임금도 배종함.

3월 20일

• 임금 일행이 송계원평(松溪院平)에서 점심을 먹으니, 성비(誠妃) · 대비 · 공비(恭妃)가 내시를 보내 풍정(豊呈)을 드렸으며, 저녁에 환궁함.

3월 25일

• 상왕이 임금과 동교에서 해청(海靑)을 날리는 것을 구경함.

3월 27일

• 상왕이 인정전 문 밖의 행랑을 잘못 지은 박자청(朴子靑)을 면직함.

3월 29일

• 임금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문과를, 경회루에서 무과를 고시함.

4월 2일

• 상왕과 노상왕이 동교에서 매사냥을 구경하니, 임금이 낙천정에서 잔치함.

4월 8일

• 서선(徐選)을 한성부윤으로 삼음.

4월 12일

• 임금이 마전포(麻田浦)에서 상왕을 영접하고, 본궁으로 돌아옴.

• 고려 문하부 주서를 지낸 길재(吉在)가 죽음.

4월 14일

• 석전(石戰)을 잘 하는 사람으로 자원자를 받아 대오(隊伍)를 형성하는데, 상공천예(商工賤隸)와 양가 자제의 부역을 면해주고 등용하도록 함.

4월 15일

• 상왕이 임금과 동교에 나아가 해청(海靑)을 날렸는데 도망감. 살곶이 강변에서 고기 노는 것을 구경하다가 저물녘에 돌아옴.

• 상왕이 인정문 밖에 행랑을 세우지 말고 다시 담장을 쌓아 그 뜰을 넓게 하라고 함.

4월 17일

• 이맹균(李孟畇)을 판한성부사로 삼음.

4월 20일

• 임금과 상왕이 평산에 행차함.

• 예조에서 4월 18일에 실시한 잡과(雜科) 방목을 발표함. 역과(譯科) 15명, 음양과(陰陽科) 9명, 의과(醫科) 9명, 율과(律科) 9명.

4월 21일

• 어가가 개경에 도착함. 덕안전(德安殿)에 들러 새 진전(眞殿)을 구경하고 경덕궁에 머묾.

4월 26일

• 수강궁의 남쪽 행랑이 낙성됨.

• 수강궁의 문을 짓도록 함.

4월 27일

• 동 · 서반 관리와 방리(坊里) 사람을 동원하여 도성 아래 산의 송충이를 없애도록 함.

4월 29일

• 상왕이 수강궁의 누문(樓門) 공사와 창덕궁의 은구(隱溝)를 파게 함.

5월 1일

• 임금의 행차가 평산 온천에 머묾.

5월 3일

• 태조진전(太祖眞殿)이 낙성됨.

5월 4일

• 임금이 제릉(齊陵)에 거둥하여 제사하고 경덕궁으로 돌아옴.

5월 7일

• 수강궁에서 일하던 선군(船軍)을 놓아 각각 방어소로 돌려보냄.

• 임금 일행이 환궁함.

5월 12일

• 임금과 상왕이 낙천정에서 한성부윤 이맹균 등을 위로함.

5월 13일

• 임금과 상왕이 한강 상류에 누선(樓船)을 띄워 화포를 시험함.

5월 18일

• 임금과 상왕이 두모포 백사정(白沙汀)에 거둥하여 왜구 정벌을 떠나는 이종무(李從茂) 등 여덟 장수를 전송함.

5월 19일

• 불교계 각 종(宗)의 판사(判事)를 한성 내 도회소 주지만으로 임명하도록 함.

5월 24일

• 군자감과 광흥창의 묵은 쌀과 콩을 팔아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함.

• 왜적이 날뛰니 요해지를 지켜 간첩을 막도록 함.

5월 25일

• 대마도 정벌을 위해 삼군도통사 유정현(柳廷顯)이 떠나므로, 상왕이 친히 선지(宣旨)와 부월(斧鉞)을 주어 보냄. 상왕과 임금이 한강정(漢江亭) 북쪽에서 전송함.

5월 26일

• 병조에서 왜적 침입에 대비하여 봉화 드는 횟수를 바꿀 것을 아룀. 해상과 육상을 구분하여 각각 5거(炬)로 재구분.

5월 28일

• 살곶이목장의 땅을 도적질하여 경작한 판좌군도총제부사 김남수(金南秀)를 파면함.

• 예조에서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의논하여 각도의 생원시 선발 인원 수를 정함.

5월 29일

• 가뭄으로 인하여 풍운뇌우 · 산천 · 삼각산 · 목멱산 · 한강 · 태일전에 비를 빌게 함. 중들은 흥복사(興福寺)에서, 아이들은 푸른 옷차림으로 도마뱀을 부르며 경복궁 경회루에서 빌게 하고, 무당을 모아 비를 빌게 함.

6월 1일

• 의금부로 하여금 왜인 포로 4명을 베고, 중 정우에게 안장을 갖춘 말과 의복을 주어 흥천사에 우거하게 함.

6월 2일

• 저자를 옮김.

6월 3일

• 동방토룡(東方土龍)에게 비를 빌고, 이후 남방 · 중앙토룡에게도 빎.

• 수강궁 부역군인을 풀어줌.

6월 4일

• 상왕이 낙천정으로 옮김.

6월 6일

• 임금이 낙천정에서 주연을 베풂.

6월 8일

• 민여익(閔汝翼)이 종묘에서 비를 빌고, 이조판서 맹사성(孟思誠)에게는 소격전에서, 검교 한성부윤 최덕의(崔德義)에게는 석척기우(蜥蜴祈雨)를 경회루 못가에서, 우의정 이원(李原)에게는 원구(圜丘)에서 비를 빌게 함.

• 병조에서 낙천정의 시위 인원 75명을 차정함.

6월 9일

• 비가 오니 기우제를 정지하게 함.

• 상왕이 대마도 정벌에 대해 중외에 교유함.

• “대마도란 섬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었던 것을 멀리 떨어져 있고 땅이 나쁘다고 해서 왜인들이 차지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이다.(중략) 지금 농사철도 상관하지 않으면서 장수를 임명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그자들의 죄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 간악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소탕하고 백성들을 불과 물 속에서 구원할 목적으로 이렇게 이해관계를 따져 나의 의사를 신하와 백성에게 알려주는 바이다.”

6월 13일

• 상왕이 임금과 함께 낙천정에 거둥함.

6월 15일

• 상왕이 임금과 저자도(楮子島)에 행차하여 배를 띄우고 양녕대군을 불러 연회를 베풂.

6월 16일

• 상왕이 낙천정에 머물고, 임금은 환궁하였으며, 양녕대군은 수강궁에 나아감.

6월 17일

•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9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도를 떠나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가, 바람에 거슬려 다시 거제도에 와서 배를 맴. 병선은 경기도 10척, 충청도 32척, 전라도 50척, 경상도 126척, 총계 227척. 서울로부터 출정 나간 모든 장수 이하 관군 및 따르는 사람이 669명이고, 갑사 · 별패 · 시위 · 영진속(營鎭屬)과 자기가 모집한 건강한 잡색군(雜色軍)과 원기선군(元騎船軍)을 병합하여 1만 6,616명이니, 총수가 1만 7,285명으로 65일간의 양식을 준비함.

• 임금이 낙천정에서 잔치를 베풂. 환궁에 양녕대군도 따름.

6월 19일

•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하여 다시 대마도로 향함.

6월 20일

• 노상왕이 모화루로 피서하니, 상왕과 임금이 문안함.

• 대마도정벌군이 대마도에 도착하여 전과를 올림. 이전에 상왕이 행군이 늦음에 대한 문책 교지를 내림. 적선 129척을 빼앗아 20척을 제외하고 불사르고, 도적의 가옥 1,939호를 불태웠으며, 114구를 목 베고 21명을 사로잡음.

6월 22일

• 상왕이 낙천정에 행차함.

6월 29일

• 대마도정벌군의 유정현 종사관 조의구(趙義昫)가 대마도에서 돌아와 승전을 고함.

7월 1일

• 노상왕의 탄일로 상왕과 임금이 경복궁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풂.

7월 4일

• 상왕이 낙천정에 행차하였다가 살곶이 냇물이 넘쳐 배로 건너 날이 저물어 돌아옴.

7월 7일

• 정역(鄭易)을 한성부사로 삼음.

• 동정(東征)한 여러 절제사는 모두 좌목(座目)을 올리고, 상왕이 동지총제 이춘생을 보내 동정 군중(軍中)에 나아가 하사한 술로 제장을 위로함. 이종무 이하 10장수에게 갑옷을 내림. 다시 대마도의 왜적을 치게 함.

7월 9일

• 예조에서 오부학당의 동 · 서재(東西齋)가 낮고 작으며 더럽고 좁으니 조성색(造成色)을 두어 넓히기를 아뢰니, 임금이 유후사의 절을 헐어 그 재목과 기와를 걷어서 집을 짓도록 함.

7월 14일

• 군기와 화약을 수강궁의 군기고에 두게 함.

7월 17일

• 조관의 평상시 조회복을 제정함.

7월 18일

• 귀화한 왜인을 이용하여 먼저 대마도를 교유하게 하고, 삼군통제사 유정현 등을 서울로 부름.

7월 19일

• 상왕이 낙천정에서 날이 저물어 돌아오니, 임금이 수강궁에 문안함.

7월 20일

• 전문(箋文) 외의 주홍(朱紅) 인(印)을 금함.

• 예조에서 오부학당의 인(印)을 철로 만들 것을 아룀.

7월 23일

• 상왕이 섭대장(攝隊仗) 등 군인 300명을 모아 수강궁 담을 쌓도록 함.

7월 28일

• 상왕이 임금과 동교에서 농사짓는 것을 보고, 낙천정으로 감.

• 9 · 10월의 대마도 섬멸을 위해 각도에서 병선을 수리하도록 함.

8월 1일

• 대마도정벌군 유정현이 경상도에서 돌아오니 한강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게 함. 전라도에서 돌아온 최윤덕 등을 상왕과 임금이 만나 위로함.

• 서울 안의 각 관청 관리들도 지방 수령의 예와 같이 1년에 2회 업무를 평가하게 함.

8월 2일

• 미곡으로 금 · 은을 사들이게 하고, 금 · 은의 예에 의거하여 저화를 쌀로 사들이게 함.

8월 3일

• 서울에서 관청이나 개인에게 노비로 하사하였던 왜인들의 부자 상봉을 허락함.

8월 4일

• 이종무(李從茂) · 우박(禹博) · 박성양(朴成陽) · 서성재(徐省材) · 상양(尙陽) · 이징석(李澄石) 등 대마도 동정군 지휘부가 돌아옴. 상왕과 임금이 낙천정에 거둥하여 주연을 베풀고 위로함. 강원도 영동(嶺東)의 소나무로 배를 만들어 경상도로 보내기로 함.

8월 5 · 6일

• 박은 · 유정현이 병선을 만들고 변방의 성을 쌓는 일에 민력을 쓰는 것이 급하다고 말하니, 강원도 재목을 베어 준비하게 하고, 태평관 증축을 그만두게 함.

8월 7일

• 상왕이 천태종 서울회관에서 환우로 피접해 있는 노상왕을 뵘.

8월 8일

• 임금이 경복궁 외전은 칙명을 맞는 곳으로 수리해야 하지만, 내전은 수리할 것 없다고 함.

• 노비 100명을 성균관에 하사함.

8월 10일

• 상왕이 임금과 함께 선양정(善養亭)에서 주연을 베풀고, 동정했던 유정현 · 이종무 · 최윤덕 등 여러 장수를 위로함.

8월 12일

• 노상왕(정종)이 병 피접을 위하여 서강(西江)에 사는 박인(朴因)의 집에 감.

8월 13일

• 상왕이 건원릉에서 중추별제(仲秋別祭)를 거행함.

8월 15일

• 상왕이 임금과 함께 판한성부사 정역 등 사은사 일행을 전송함.

8월 17일

• 명나라 사신 태감(太監) 황엄(黃儼)이 도착함. 상왕과 임금이 평시 복장으로 모화루에 나아가 영접하고, 경복궁으로 인도함. 선양을 윤허한다는 칙서를 선포함.

8월 23일

• 전에 태조가 속설로 전하는 석가여래의 치아에서 나온 사리 네 개와 두골과 패엽경(貝葉經) · 가사(袈裟) 등을 흥천사 석탑 속에 두게 하였음. 이 때 와서 내시 김용기(金龍奇)를 석탑 있는 데로 보내 내불당(內佛堂)에 옮겨 놓고, 그 대신 두골에서 나온 사리 네개를 석탑 속에 바꿔 넣게 함. 22일 명나라 사신이 사리를 요구함.

8월 24일

• 상왕과 임금이 경복궁 금천교에서 명에서 보낸 양(羊) 1,052마리를 인계받음.

8월 27일

• 명에서 보낸 양을 판통례문사 이상, 전직 종2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나누어 줌.

• 각도 절의 승려들이 계속해서 부처의 뼈와 사리를 헌상해오므로, 문소전(文昭殿) 불당에 모아 두게 함.

• 서울 이외의 지방에 나누어 준 왜인 노비의 상봉을 금하도록 함.

8월 30일

• 내불당에 옮겨 두었던 사리를 명나라에 보내기로 함.

9월 1일

• 명나라 사신 황엄 등이 흥천사에 가서 공양하고 사리를 가지고 돌아옴.

9월 2일

• 임금이 태평관에서 명나라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풂. 왕현이 황엄 몰래 사리 4개를 내놓음.

9월 4일

• 임금이 매일 수강궁에서 국가 대사(大事)나 군무(軍務)를 상왕에게 아뢰는데, 원숙이 사관(史官)도 시종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음.

• 변계량이 를 지어 바침. 권홍(權弘)에게 써서 판에 새겨 걸게 함.

9월 8일

• 이명덕 등이 황엄을 따라 흥천사에 가서 공양을 올리고, 석탑을 열고 석가여래의 정수리 뼈와 사리 4개를 꺼내어 태평관으로 돌아감.

• 왕현이 갈두봉(加乙頭峯)에서 놀며 구경함.

9월 10일

• 황엄이 왕현을 시켜 목멱산에 제사지내게 함.

9월 11일

• 상왕이 낙천정에 거둥함.

9월 12일

• 황엄이 왕현을 한강정(漢江亭)에 나가 놀게 함.

9월 13일

• 임금이 문묘에 술을 올릴 때는 면류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정함.

9월 16일

• 서울에 집을 짓기 위해 경기와 강원도 소나무를 베어 가는 것을 허락함.

9월 19일

• 임금이 경연에서 윤회(尹淮)에게 《고려사》 내용이 사실과 맞지 않은 곳이 많으니 개수해야 할 것이라고 함.

9월 20일

• 노상왕의 병세가 위중해져서 서강에서 인덕궁으로 돌아옴.

9월 20일

• 임금이 유관(柳觀)과 변계량(卞季良) 등에게 정도전(鄭道傳)이 찬수한 《고려사》를 개수하게 함.

9월 23일

• 수강궁에 승문고(升聞鼓)를 설치하여 군사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게 함.

9월 25일

• 맹사성(孟思誠)을 판한성부사로 삼고, 대마도 정벌의 공을 논하여 200여 명에게 상직을 줌.

9월 26일

• 노상왕 정종이 인덕궁 정침에서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남.

9월 27일

• 판한성부사 맹사성을 국장도감제조에 임명하는 등 국장도감과 산릉도감의 제조를 임명함.

10월 4일

• 수강궁에 다락으로 된 침실을 새로 지음.

10월 9일

• 김구덕(金九德)이 수강궁에서 향(香)과 소제문(疏祭文)을 받들고, 흥덕사에서 이재(二齋)를 차림.

10월 11일

• 한성부윤 이맹균(李孟畇)이 수강궁에서 향과 소문(疏文)을 받들고, 흥덕사에서 도각법석(圖覺法席)을 차림.

10월 15일

• 박자청(朴子靑)이 태평관의 어실(御室)을 짓기 시작함.

10월 16일

• 부윤 유장(柳暲)이 수강궁에서 향과 소제문을 받들고, 흥복사에서 삼재(三齋)를 차림.

10월 23일

• 이중지(李中至)가 수강궁에서 향과 소제문을 받들고, 흥천사에서 사재(四齋)를 차림.

• 진무(鎭撫)를 철원 · 영평 등지로 나누어 보내 노루와 꿩을 사냥해 종묘에 바치게 함.

10월 26일

• 인정전 그림이 완성되지 않아, 대궐 앞 악차에서 조회 받음.

10월 28일

• 상왕이 임금과 동교에서 매사냥을 구경하고, 낙천정에 머묾.

11월 1일

• 김구덕이 향과 소문을 받들고 오재(五齋)를 장의사에서 베풂.

11월 3일

• 상왕이 임금과 함께 강무를 위해 강원도로 떠남.

• 한성부윤 서선(徐選)이 향과 소문을 받들고, 대미타참법석(大彌陀懺法席)을 빈전(殯殿)에 베풂.

11월 13일

• 임금과 상왕이 강무를 마치고 환궁함.

11월 15일

• 산학박사(算學博士) 두 사람 중 지리와 산수를 같이 통하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한성부의 토지측량 사무를 겸하도록 함.

• 태평관에 부역한 군인의 술값으로 저화 400장을 하사함.

11월 16일

• 태평관 개조공사를 하게 함.

11월 20일

• 상왕이 낙천정에 거둥함.

11월 21일

• 낙천정에 부역한 보충군 200명에게 술을 내리고 5일에 한하여 일하게 함.

11월 24일

• 상왕이 전날 포천 풍양에 이궁을 지을 뜻을 말하고, 거둥하여 이궁 지을 터를 살핌.

11월 30일

• 상왕이 임금과 내전에서 대신들을 인견하고, 삼군진무가 병조를 대리하여 군무를 맡는 일과 회암사 중들의 전토 축소에 대하여 의논함.

12월 1일

• 상왕이 임금과 동교에서 매사냥을 보고, 낙천정에 가서 입시한 대신들과 삼판선(三板船)을 건조하여 양화도에서 시험하는 일 등을 논의함.

• 각 절의 노비를 혁파하도록 왕지(王旨)를 내림.

12월 2일

• 대행상왕의 시호를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라 하고, 능호를 후릉(厚陵)이라 함.

12월 4일

• 숭효사(崇孝寺) · 감로사(甘露寺) · 대자암 등 각 절의 노비를 수강궁에 이속시킴. 세 절의 노비는 거의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선대가 시주한 것임.

12월 6일

• 한성부윤 한 자리를 줄임.

12월 7일

• 정진(鄭津)을 판한성부사로 삼음.

12월 8일

• 상왕과 임금이 낙천정에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풂.

12월 11일

• 사찰노비를 승록사(僧錄司)에 이속시켜 한성에 있는 태조가 창건한 흥천사 · 흥덕사 · 흥복사에 윤번으로 돌리기로 하고, 예조로 하여금 중들이 원하는 사목을 만들어 아뢰게 함.

• 불충죄를 범한 사람의 자손이 평민과 혼인할 수 있도록 허가함.

12월 12일

• 승과에 응시할 때 여러 부처와 여래의 《명칭가곡(名稱歌曲)》을 외우는 중에게만 자격을 줌.

12월 13일

• 성녕대군의 원찰인 대자암(大慈菴)에 밭 50결을 더 주게 함.

12월 14일

• 일본국 왕의 사신이 서울에 오니 한강에서 맞이함.

• 천보산(天寶山) 재목을 벌채하여 풍양에 이궁을 기공하게 함.

12월 17일

• 한성부윤 서선(徐選)이 권홍과 함께 표문과 전문을 가지고 북경에 감.

12월 18일

• 상왕이 동교에서 매사냥을 구경함.

• 임금이 명하여 경복궁을 수직하는 종 30명은 한성에 사는 건실한 각 관청의 노자를 가려서 쓰게 함.

12월 20일

• 상왕과 대비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의 집으로 이어함.

12월 23일

• 포천의 속현 풍양을 양주도호부에 합치게 함. 경비로 쓸 미곡을 연복사(演福寺)에 보관하게 함.

12월 24일

• 상왕이 건원릉에서 정조별제(正朝別祭)를 지냄.

12월 27일

• 비가 개기를 사직단에 빎.

• 대행 상왕의 재궁(梓宮)을 발인함.

• 회암사 주지와 색장(色掌)은 모두 계행(戒行)을 지키는 도반승(道伴僧)으로 하게 함.

12월 28일

• 섣달 그믐날 밤이므로 나례(儺禮)를 행함.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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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년(辛巳年), 14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