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1

최치원 1

분류 문학 > 초월적 인물형 > 신선(神仙)형

• 갈래 : 전설
• 시대 : 삼국
• 신분 : 장군
• 지역 : 영남
• 출처 : 삼국사기 (권46)
• 내용 :
최치원의 자(字)는 고운(孤雲, 혹은 海雲)인데, 경주 사량부 사람이다. 어려서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했다. 이때 부친이 배를 타고 떠나는 아들을 보고, “10년 동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하고 말했다. 당나라에서 건부 원년(乾符, 874)에 급제하고, 선주(宣州) 율수현위(水縣尉)에 제수되었으며, 치적이 좋아 진급되었고 자금어대(紫金魚袋)도 하사받았다. 이때 황소(黃巢)의 반란이 있어서 고병(高騈)이 토벌 장수로 나가는데.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삼아 서기(書記)의 책임을 맡겼다. 그래서 당시에 쓴 표장서계(表壯書啓)가 뒤에까지 전해졌다. 최치원이 28세 때, 광계 원년(885)에 귀국해 중국에서 얻은 여러 지식을 가지고 본국에서 뜻을 펼치려 했으나, 신라의 말기 형편이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대산군 태수를 거쳐 부성군 태수가 되었을 때, 하정사(賀正使)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당시 흉년으로 도적이 들끓어 길이 막혀 임무수행을 하지 못했다.

그 뒤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신라에서 그가 시행하려는 시책이 모두 방해를 받으니, 벼슬을 버리고 산야로 떠돌아 시를 읊으며 방랑했다. 경주 남산과 강주 빙산, 합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 등의 지역이 모두 그가 가서 유람하던 곳이다. 말년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은거해 거기에서 늙었다. 중국에서 돌아올 때, 당나라에서 친했던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전별시를 주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한 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있다고 했고, 또 따로 문집(文集) 30권이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치원은 고려 태조가 처음 나라를 세울 때, 반드시 천명(天命)을 받아 나라를 건국할 수 있을 것을 미리 알아, “계림(鷄林, 신라)은 시드는 잎이요 곡령(鵠嶺, 고려)은 푸른 소나무이다.”라는 글을 써서 왕건에게 올렸다. 그래서 최치원의 문인들이 고려 초에 많이 관직에 임용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최치원이 앞에서와 같은 글을 보내 은밀히 고려 건국을 도운 공적을 들어, 내사령(內史令)을 증직(贈職)하고, 다시 문창후(文昌侯)의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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