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씨부인의 기도와 이공의 구도

오씨부인의 기도와 이공의 구도

[ -求道 ]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신앙설화

• 주제 : 신앙
• 국가 : 한국
• 시대 : 조선
• 지역 : 전라도
• 참고문헌 : 불교영험설화

우리나라 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진도는 4방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으니 적막한 섬으로 옛날에는 유배지로 삼는 곳이다. 조선시대 선조 때이니 동 ·서인간의 당쟁이 자심하였으므로 모함을 받아 유능한 사람이 혹은 몰락하고, 혹은 유배당하는 등 난마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이응(李應)은 좌천되어 진도군수로 명을 받았으니, 그는 생각하되 관직을 삭탈당하고 정배(귀양)를 가는 것보다 나은 것으로 체념하고 자위하면서 부임하였으며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왔다. 진도는 때마침 태풍이불어서 민가에 피해가 많았다.
그 시절에는 태풍이라기보다는 다만 폭풍우가 몹시 불어서 내륙에는 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접단은 침수되어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며 해안에는 선박의 피해가 많다. 이응은 그 실태조사를 하고 백성을 위문하기 위하여 포구로 나갔더니 마침 일본 배 한척이 바람에 밀려서 표류하다가 진도 필구에 닿게 되었다.
이에 아전들은 그들을 포박하여 옥에 가두고 재물마저도 빼앗으려고 하는 참이다.
군수 이응은 이를 보고 꾸짖어 말하되
「산 짐승도 난을 만나서 민가의 집안으로 들어오면 해치지 않고 잘 보호하였다가 살려 보내주는 법이거늘 하물며 사람을 이렇게 대접 할 수 있느냐!」
라고 타이르면서 비록 일본 땅에 사는 외국인일 지라도 그들이 조난을 당하여 내 나라에 온 사람인데 죄 없는 사람들을 포박하여 옥에 가두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으려 하는 것은 천부당한 일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옥에 가둔 왜인들을 빨리 내놓고 포박을 풀어주고 정결한 객사에 안내하여 친절하게 영접 위문하고 후하게 식사대접을 하라. 관명들 어기고 너희 마음대로 하면 큰 벌을 주리라.」
고 호령하는 것이었다.
이응은 자신이 그들에게 사과하고 10여일 동안을 묵게하여 치료도 해주고 음식물을 제공해서 친절하게 대우하였다.
그리고 좋은 날을 가려서 타 온 배를 수리하여 귀국케 하되 먹을 양식까지 주어서 후하게 돌려보냈다. 그들은 이응에게 고두백배하고 은혜가 뼈에 사무친다고 치하하며 떠나갔다.
그 뒤에 이응의 손자인 창해(蒼海)가 제주도 목사가 되어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태풍을 막나 20여명이 바다에 익사하고 목사 창해와 그밖에 3인만이 살아서 배가 깨어진 널쪽을 붙들고 표류하어 떠나다가 일본 땅인 지마도(志摩島)섬에 표착하였다.
도민이 그들을 포박하여 도주에게 알리니 도주가 물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붓으로 써서 필담으로 물었다.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우리들은 조선 사람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일본 땅에 왔느냐.」
「우리 네 사람 가운데 이 분은 이창해란 분으로 제주도 목사로 제수되어 부임 도중에 태풍을 만나서 20여명의 관속이 바다에 빠져죽고 우리 네 사람만이 천우신조로 살아서 표류하다가 이곳에까지 온 것이다.」
「정말이냐. 거짓말을 하딘 용서가 없다. 너희가 장사꾼이나 해적이 아니냐.」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창해란 사람이 제주도 목사로 가다가 이렇게 조난을 당하였다고 하니 조선국의 양반인 모양이로구나.
네가 양반이라면 몇 해 전에 진도군수로 있던 이응(李應)이란 사람을 알 수 있겠느냐.」
「그분은 바로 나의 조부모님이시다.」
하였더니, 문초를 하던 도주는 마치 은인을 만난 듯이 반가워하며 결박한 오랏줄을 손수 풀어주고 관아로 안내해 들어가며 나머지 3인도 포박을 풀게 하고 같이 뒤따르게 하였다.
옷을 갈아입히고 차를 권하면서 말하되
「그대의 조부 이응이란 분은 나의 은인입니다. 우리도 몇 해 전에 장사차 항해를 하다가 폭풍을 만나 조선군인 진도에까지 표류되어 갔는데 우리가 꼭 죽게 된 것을 그대의 조부를 만났기 때문에 융숭한 대접과 보호를 받다가 식량도 받아 싣고 돌아온 사람이외다.」
하고 무척 기뻐한다.
같은 식구를 대하듯이 친절하고 고맙게 영접하여 준다.
그리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융숭한 대우를 하여주매 비록 말이 서투른 외국인이지만 쓸쓸한 정을 잊어버리고 달포를 지나게 되었다.
그러자니까 한집 식구와 같아서 서먹서먹함이 없게 되었다.
창해는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여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타고 갈 배가 없는 이상 지마도주가 선심을 베풀어 배를 마련하고 사공까지 끼어서 태워 보내주기 전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일이다.
설사 고국을 찾아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떳떳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같이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던 관속은 모두 죽었는데 자기만 살았다고 다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도주가 말하기를
「이곳은 일본에서도 아주 외롭게 떨어진 섬이 되어서 독립한 나라나 다름없고 조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내가 이곳의 왕이나 다름없이 권리를 펴고 사는 곳이오. 당신들 네 사람에게 이곳 여자와 다 장가를 들게 하여 줄 터이니 나를 보필해서 섬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하여 주시기 바라오.」
한다. 창해일행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독 속에 든 쥐의 신세라 반대할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창해가
「뜻에 따르도록 하겠소이다.」
하고 대답하니 도주가 다른 세 사람에게도 다 승낙을 요구하므로 그들 역시
「고맙습니다. 배려대로 따르겠습니다.」
고 하였다. 네 사람이다.
30세 전후의 청년이었으므로 이러한 섬에서 배필 없이는 살아가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에 도주에게는 무남독녀로 외딸이 있었는데 도내에서 뛰어난 미인이었다.
꽃다운 20여세로서 창해를 잘 따르고 있었다.
창해도 호걸이며 장부인지라 그 여자가 싫지 않았던지 은연 중 서로 연모하고 있었다.
사랑은 참으로 국경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주가 말하기를
「창해는 나의 사위가 되어주오. 내가 남자아들이 하나도 없고 저 외로운 딸 하나만 있는데, 저것을 남의 집으로 보내고는 우리 내외가 허전해서 살 수가 없소.
그러나 데릴사위를 얻으면 이곳 풍속은· 옛날부터서 양자란 법이 있어서 사위가 장인의 성을 따르고 아들대신 자식이 되는 법이니 그리 알고 나 씨족을 이어가게 하여주오.」
한다. 창해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차라리 바다에서 빠져죽은 것만 같지 못한 신세였다.
(내가 왜놈이 되다니, 내가 왜놈이 되다니.)하고 몇 번이고 뇌까려 보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도주의 딸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면 천 생각 만 생각이 스지러는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어라> 하고 승낙하기로 하였다. -도주는 나를 구명하여 주신 은인이요, 또한 나의 나라로 곧 돌아갈 수도 없는 사정이며 설사 돌아간다 하더라도 면목이 없는 일이니, 모든 일을 인연하여 소치로 체념하고 창해가 말하니
「아, 참 잘 생각하였소.」
하고 불야살야하고 날짜를 가려서 결혼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창해는 열두 살 때에 부모가 시키는 대로 자기보다 여섯 살 위인 18세 되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으므로 부부의 애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다가 19세 때에 상처를 하여 홀아비가 된 사람이라 비록 타국의 처녀라도 자기보다 7세나 아래 되는 여성이었고 또 얼굴이 미인이요, 남편에 대한 공대와 예절이 바른 까닭으로 부부애가 진진하였다.
처음엔 말이 통하지 않아 거북한 점이 많았으나 1년여에 걸쳐 열심히 배워서 이제는 못하는 말이 없었으며 일행 세 사람도 다 장가를 들어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이창해는 서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李)라는 성을 고쳐서 도주의 성인 <모찌모도一持元>라는 성을 따라 창해는 한문 글을 잘하여 도민 자체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유명한 선생님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장인의 일을 거들면서 지마도내의 행정과 치안 등 일체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몇 해를 지나서 도주가 이미 나이가 많고 몸이 늙어서 정사를 볼 수가 없게 되매 모든 권한을 창해에게 맡기고 물러나 않게 되니 급기야 창해가 영주가 되고 도주가 되어서 도민을 다스리게 되었다.
지마도 근처에는 다른 섬도 적지 않게 분포되어, 있는데 도주끼리 세력다툼으로 무법천지의 노략질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창해가 군사를 조련시켜 그들을 다 평정하였던 것이다.
창해와 같이 갔던 세 사람도 역시 그 부하가 되어 요직을 맡아보며 서로옛말을 나누면서 살아갔다.
어느 때 조용히 만나게 되면,
「영주님, 제주도 목사로 가신 것보다 낫소이다. 목사야 이내 갈리고 마는거요. 또 관찰사니 판서니 하는 중앙정부의 요직이란 것은 승차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인데 이 섬의 영주는 만년장군이요, 만년도주가 아니겠습니까. 영토가 적어서 유감이지 제왕이 된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서로 치하하여 술잔을 나누는 일도 있었다.
창해가 이 섬의 도주가 되고 영주가 되어서 이웃 섬을 평정하고 선정을. 베풀며 30년을 지나는 동안에 아들 형제를 낳아서 기르게 되었다.
그 가운데 장자인 의충(義忠)은 뛰어난 맹장이 되고 도량이 넓어서 자기의 대를 물릴 만하였다.
그래서 벌써 나이 60을 넘어서 환 · 진갑을 다 지내고 노경에 이르렀으므로 도주의 권한을 의충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여 쉬면서 도민자체의 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사행정의 고문격으로 큰일만을 보아주고 있었다.
한편 고국에서는 창해의 어머니 오씨(吳氏)가 강원도 고성에 살고 있었는데 본시 불교신자로 관음신앙에 더욱 철저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제주도 목사로 떠날 때부터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송하였다.
<대비주-大悲呪>를 외우며 기도하였다.
그런데 풍랑을 만나서 목사일행이 몰사했다는 전갈을 듣고 실신 졸도까지 하였다.
그러나 오씨는
「천하 사람이 다 죽어도 내 아들은 죽을 리가 만무하니까 안 죽고 살았거든 돌아오너라.」
하면서 부처님께 축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아들이 제주도 목사로 떠나간 날에는 양양 낙산사에 가서 관음보살께 기도를 드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 오씨는 창해가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남양(南陽)이란 동생이 있었는데 그가 조부모와 부모의 상을 다 치르고 농사를 지으면서 고성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유언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너의 형 창해를 위하여 네 형이 떠난 날에 반드시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관음기도를 올려주어라.」
하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남양 역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지라 어머니의 유언을 잊지 않고 1년에 한번씩 형이 떠나간 날이면 낙산사로 불공기도를 가는 것이었다.
창해가 하루는 지마도 바닷가에서 혼자 배를 타고 낚시질을 하자니까 별안간 바람이 일더니 무서운 파도가 일어나며 바람과 같이 휘몰아와서 창해가 탄 배를 어디론지 떠 밀려갔다. 창해는
「이제는 영락없이 죽었구나.」
하는 체념 가운데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염불하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서 <나무관세음보살>을 지극한 마음으로 부르며
「제가 이 바다에서 고기밥이 되더라도 영혼은 극락세계로 인도하시와 온갖 죄를 다소 멸시키고 다시 좋은 후 세상을 만나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여주소서.」
하고 축원하였다 어머니와 동생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 되어서였다.
태풍이 밀고 가던 낚싯배가 닿은 곳은 강원도 통천(通川)땅의 총석정이었다.
그런데 창해는 의복만 젖었을 뿐 신체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는 어려선 관동(關東)팔경을 구경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난다.
창해는 배에서 내려 고국산천을 바라보니 감개무량하였다.
「내가 꼭 왜의 땅에서 죽을 줄 알았더니 어찌하여 고국에 돌아 왔는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렇게 외친 다음 한참 앉아서 쉬고 있다가 얼떨떨한 정신을 돌린 이 창해는
「이미 이곳을 왔으니 어머니가 다니시던 낙산사에 가보리라.」
하고 낙산사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었다. 이때에 창해의 동생인 남양은 낙산사에서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우연히 형제가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헤어진 지 40여년이 되었으니 알아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남양이 지나치면서 보자 하니 의표가 수상한 늙은이로서 고화(古晝)에서 본 일본사람 복색이 분명하였다.
「여보 노인, 당신이 입은 옷이 일본사람 같은데 혹시 일본 땅에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였더니
「나는 의복은 일본 옷이라도 사람은 조선인이오.」
라고 말한다. 고향에라도 찾아온 사람 같은 표정 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뉘시오.」
「나는 40년 전에 제주 목사로 가던 이창해 라는 사람이오.」
「아이구, 형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당신은 누구인데 나를 형이라고 하오.」
「제가 남양이올시다. 남양이에요.」
「네가 남양이냐, 청춘홍안은 간데 없고 호호백발이 되어 만나니까 서로 마주 보아도알 수가 없구나.」 하고 서로 껴안고 울었다.
그리고 노변에 마주 앉아서 지나간 세월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창해는 조부모와 부모가 돌아 가셨다는 말을 남양으로부터 듣고 길바닥에 뒹굴면서 땅이 꺼지도록 통곡을 하였지만 그의 울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나 남양을 만난 것도 기적이었다. 관음보살의 가피였다.
남양은 친지의 집을 찾아가서 전후의 경위를 말하고 새 옷을 빌려 형 창해에게 갈아 입혔다.
이들 형제는 해우의 벅찬 기쁨을 안은 채 그 길로 낙산사를 찾아 관음보살께 감사기도를 올리는 것이었으며 한편 그들은 제주도로 갈 때 바다에서 익사한 20여의 고혼과 함께 조부모와 부모의 천도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형제는 고성(高城)땅에서 같이 살았으니 관음보살을 일심으로 염송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진도군수 이응(李應)은 해난으로 표류해온 왜인을 구제해주니 그 선업(善業)이 손자 이창해의 선과(善果)로 나타난 것이다.
즉 제주목사로 부임하던 이창해 역시 해난을 당하여 흘러 흘러 당도한 곳이 뜻밖에 왜의 땅이고 또 그곳(志摩島) 도주는 조부 이응에 의해 구제받은 장본인이라는 것과 함께 창해가 이응의 손자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러하여 마침내 이창해는 그 도주의 딸과 결혼하고 새 도주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선업을 지었으며 그 후 낚시를 즐기던 창해는 다시 풍랑을 만나 표류되어 이번에는 고향에 돌아오는 몸이 되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신묘한 현현이라 하겠으니 여기에는 이창해의 어머니 오씨의 한평생을 모두 일심으로 관음을 염송하였던 유연자비(有緣慈悲)의 가피에 의한 것이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영험이라 할 것이다.
<불교영험설화>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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