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로 나타난 관세음보살

어머니로 나타난 관세음보살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신앙설화

• 주제 : 신앙
• 국가 : 한국
• 시대 : 고려
• 지역 : 강원도
• 참고문헌 : 불교설화대사전

고려시대 초기에 설정선사(雪頂禪師)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에게는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딱한 사정의 어린 조카가 하나 있었다.
그 조카가 다섯 살 되던 어느 가을에 설정스님은 설악산으로 들어가 오세암(五歲庵)에서 한 겨울을 나기로 하였다.
오세암은 설악산 깊숙이 험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암자였으므로, 조카를 데리고 가서 참선이나 하면서 지낼 작정 이었다.
그 산의 이름과 같이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리므로, 한번 오세암에 들어가서 겨울을 만나면 그 이듬해 봄에 눈이 녹기 전에는 좀처럼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설정스님도 눈이 내리기 전에 겨울을 날 양식을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오세암으로 들어갔던 것 이다.
그러나 막상 거기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보니, 겨울을 나자면 몇 가지 더 준비해야 할 물건이 필요하였다.
그 몇 가지를 준비하자면 아무래도 산을 내려가서 구해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산 밖의 마을로 내려가면 하루만에는 돌아올 수가 없어 아무래도 하룻밤쯤은 자고 와야 했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갔다 온다면 너무 더디고 혼자서 얼른 다녀오는 것이 가장 좋겠는데, 이 첩첩 산중에 다섯 살짜리를 홀로 동그마니 남겨두고 길을 나서기 또한 난처했다.
설정스님은 결국 아이를 그곳에 두고 휭하니 다녀오기로 마음을 굳혔다. 빠른 걸음으로 다녀오면 한밤중이나 새벽녘이면 돌아올 수가 있으니까, 아이한테 잘 일러두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조카가 먹을 밥을 지어놓고, 자기가 없는 동안에 어떻게 하라는 말을 일러 주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산으로 나다니지 말고 방안에만 있거라. 심심하거나 무섭거나할 때에는 언제나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잠들기 전에는 자꾸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면, 무섭지도 않고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혹시 늦어지게 되더라도 관세음보살만 부르면 너의 어머니가 올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거라. 빨리 다녀올께.」
그는 단단히 일러놓고 또 달래었다.
그리하여, 스님은 이른 아침에 암자에서 내려왔다.
사실 산중에 어린 것을 혼자 두고 내려오는 마음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그럴수록 빨리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게 옮겨 놓았다. 마을에 도착한 그가 이것저것 볼 일을 보다가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또 밤이 되었다.
아무래도 그 밤으로 되돌아 갈 수가 없어서 이튿날새벽에 출발하기로 작정하였다.
마을에서 그날 밤 잠을 잔 설정스님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산으로 오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어느 새 밖에는 온 천지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고, 또 계속해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낭패감에 삐걱 우두커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여느 해보다 눈철이 일찍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눈을 맞으면서 길을 나서 보았으나 곧 되돌아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눈은 기승을 부리듯 많이 내렸다. 설정스님은 애가 탔다.
눈이 멎은 뒤에도 여러번 산 밀까지 갔다가 돌아섰다. 눈이 녹기 전에는 도저히 산길을 갈 수가 없었다.
어린 조카가 걱정이 되어 밥맛도 없었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어린 것이 지금쯤은 나를 기다리며 울다가 지쳐 쓰러졌겠지. 지금쯤은 굶어서 기진해 있겠지.」
그러한 생각으로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면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관세음보살을 칭념하였다. 오직 불보살님의 자비로운 힘에 의지하여 마음속으로 기원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길고 모진 추위도 가고 봄이 돌아왔다.
설정스님은 그 동안 애타는 마음으로 몇 번인지 셀 수 없이 산 밑까지 왔다가 돌아서곤 했다. 좀 추위가 누그러지는 날이면 눈에 빠지면서도 산을 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는 눈구멍에 빠져 허우적댄 적도 여러번이었다. 봄바람은 아직도 차가왔지만, 드디어 눈은 녹기 시작하였다.
간신히 사람이나 갈 수 있는 길이 트이자마자 설정 스님은 부리나케 산을 올랐다.
그 동안 두 달이 훨씬 넘었으니 어찌 살아 있기를 바라겠는가.
첩첩 산중에서 눈속에 갇힌 다섯 살 짜리가 두서너 달을 혼자서 지냈으니 어떻게 살 수가 있겠는가.
살아 있지 않더라도 그는 빨리 가 보아야 했다.
아직은 덜 녹은 눈길을 헤치며 설정스님은 착잡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암자를 향해 갔다. 힘이 매우 드는 길이었으나 그는 달음질치듯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암자에 도착한 설정스님은 몇 달 만에 오게 된 도량을 둘러볼 겨를도 없었다.
곧장 방안으로 달려가서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그의 손이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방문이 먼저 벌쩍 열려졌다.
설정스님은 깜작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뻔하였다.
바깥의 인기척을 알아채고 방안에 있던 조카 아이가 먼저 방문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방문이 열리면서 설정스님을 보고 아이는 냅다 달려 나와 매달렸다.
스님도 어린 조카를 품에 덥석 안아 꼭 껴안았다. 그들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스님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몇 달 동안 어린 것이 무얼 먹고 여지껏 살아 있다는 것인가.
한참 만에야 그는 어린 조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아이는 건강한 얼굴빛이었고 몸도 그 새 더 커진 듯했다.
설정스님이 조카에게 묻고 싶은 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무섭지 않더냐, 방이 추워서 어떻게 지냈느냐, 무얼 먹고 살았느냐, 이 삼촌을 원망하지 않느냐.」
등등, 그래서 그는 아이가 크게 부담을 느끼지 많고 대답할 수 있도록 우선 궁금한 일부터 물어보았다. 그 동안 아이가 지내온 이야기를 듣고 딘 스님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적막한 산중 암자에 혼자 남게 되고부터 몹시 무서웠다.
그래서 삼촌이 일러준 대로 자꾸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잠이들 때까지 언제나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지면 삼촌이 윗목에 차려 놓고 간 밥을 먹었다.
그러나 그 밥도 며칠을 가지 못해다 먹어 버렸다.
불씨를 단속할 줄 몰라서 군불도 지피지 못했다.
어둠만 찾아오면 싸늘한 방안은 더욱 춥고 캄캄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그럴수록 관세음보살을 열성껏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아침에 깨어나 보니 옆에는 그의 어머니가 미소를 머금고 않아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군불을 지펴서 방도 따뜻했고 김이 오르는 밥상도 차려놓았다.
그로부터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산중에 눈이 많이 내려 쌓였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방을 따뜻하게 하였고, 끼니때마다 배불리 먹여 주었다. 무서움도 쓸쓸함도 모르고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는 것이다.
어린 조카의 이야기를 듣고 난 설정스님의 눈에는 다시 감격의 눈물이 고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실은 그 아이의 친어머니가 아니라 관세음보살이 그 어머니로 몸을 나투셨던 것이다. 설정스님은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정성스럽게 절하였다.
자꾸만 감사하면서 공경 예배하였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그 암자이름을 오세암(五歲庵)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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