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에 맞고 살아난 한용운 선사

총에 맞고 살아난 한용운 선사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신앙설화

• 주제 : 신앙
• 국가 : 한국
• 시대 : 근현대
• 참고문헌 : 한용운전집

죽다가 살아난 이야기. 그것도 벌써 20년전 일이니 기억조차 안개같이 몽롱하다.
조선 천지에 큰 바람과 큰 비가 지나가고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던 그 이듬해이니 아마 1919년 가을인가 보다.
몹시 덥던 더위도 사라지고 온 우주에는 가을 기운이 새로울 때였다. 금풍(金風)은 나뭇잎을 흔들고 벌레는 창밑에 울어 멀리 있는 정인의 생각이 간절한 때였다.
이 때 나는 대삿갓을 쓰고 바람을 지고 짧은 지량이 하나를 벗을 삼아 표연히 만주길을 떠났었다.
조선에 시세가 변한 이후로조선 사람이 사랑하는 조국에서 살기를 즐기지 않고 무슨 뜻을 품고 오라는 이도 없고 오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는 만주를 향하여 남부여대(南負女戴)로 막막한 만주벌판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는 고국에서 먹고 살 수 없어 가는 사람도 있었고, 또 뜻을 품고·간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때에 불교도 이었으니까 한 승려의 행색으로 우리 동포가 사는 만주를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동포들을 만나 보고 서러운 사정도 서로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이역(異域)생활을 묻기도 하고 고국 사정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곳 동지와 협력하여 목자(牧者)를 잃은 양(羊)떼같이 동서로 표박하는 동포의 지접할 기관, 보호할 방침도 상의하였다.
근일에는 그곳을 가보지 못하였나, 그때에 그곳은 무슨 이상한 불안과 감격과 희망 속에 싸여 있었다. 낮에는 장산에 올라 풀뿌리를 캐고 조를 뿌리어 가을에 길이 넘는 조를 베어 들여 산 밑에 있는 게딱지같은 오막살이에 거두어들여서 조밥을 배불리 먹고 관솔불 켜고 천하대사를 통론하며 한편으로 화승총(火繩銃)을 가지고 조련을 하던 때였다.

그리고 조선 내지에서 들어온 사람을 처음에는 불안으로, 그 다음에는 의심으로, 필경에 의심이 심하면 생명을 빼앗는 일까지 종종 있던 예였다.
내가 죽다가 살아난 일도 이러한 주위 사정 때문에 당한 듯하다.
그 때는 물론 어찌하면 그런 일을 당하였는지 모르고 지금까지 의문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내가 조선에서 온 이상한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받아서 그리 된 듯하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만주에서도 깊은 두메인 어떤 산촌에서 자고 오는데 나를 전송한다고 2·3인의 청년이 따라나섰다.
그들은 모두 연기 20세 내외의 장년인 조선청년들 이었으며, 모습이나 기타 성명은 모두 잊었다.
길이 차차 산골로 들어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는데 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이 들어서 있고 백주에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길이라고는 풀 사이라 나뭇꾼들이 다니던 길같이 보일락 말락하였다.
이러자 해는 흐리고 수풀 속은 별안간 황혼 때가 된 곳 같이 캄캄하였다.
이 때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청년 한명이별안간 총을 쏘았다.
아니 그때 나는 총을 쏘았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몰랐다.
다만,「땅」소리가 귓가가 선뜻하였다.
두 번째 「땅」소리가 나며 또 총을 맞으매 그제야 아픈 생각이 났다.
뒤 미처 총 한 방을 또 쓰는데 이 때 나는 그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잘못을 호령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말로 목청껏 소리 질러 꾸짖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성대가 끊어졌는지 혀가 굳었는지 내마음으로는 할 말을 모두 하였는데, 하나도말은 되지 아니하였다.
아니, 모기소리 같은 말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피는 댓줄기 같인 뻗쳤다 그제서야 몹시 아픈 것을 느끼었다. 몹시 아프다.
몸 반쪽을 떼어 가는 것같이 아프다.
아, 그러나 이 몹시 아픈 것이 별안간 사라진다. 그리고 지극히 편안해진다.
생(生)에서 사(死)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다만, 온몸이 지극히 편안한 것 같더니 그 편안한 것까지 감각을 못하게 되니 나는 이때에 죽었던 것이다.
아니 정말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것과 꼭 같은 기절을 하였던 것이다.
평생에 있던 신앙이 이 때에 환체(幻體)를 나타난다.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아름답다, 기쁘다. 눈앞이 눈부시게 환하여지며 절세의 미인, 이 세상에서는 얻어 볼 수 없는 어여쁜 여자, 섬섬옥수에 꽃을 쥐고 드러누운 나에게 미소를 던진다.
극히 정답고 달콤한 미소였다.
그러나 나는 이 때 생각에, 총을 맞고 누운 사람에게 미소를 던지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감상에 설레었다.
그는 문득 꽃을 내게 던진다. 그러면서
「네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
하였다.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려 눈을 딱 떠보니 사면은 여전히 어둡고 눈은 내둘리며 피는 도랑이 되어 흐르고 총을 쏜 청년들은 나의 짐을 조사하고 한 명은 큰 돌을 움직이고 있으니 그 돌로 아직 숨이 붙어있는 듯한 나에게 던지려는 것인 듯하다.
나는 새 정신을 차리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대로 오던 길로 되짚어 가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나의 피흘린 자국을 보고 따라 올 때에 내가 쫓기는 길로 간 흔적이 있으면 그들이 더 힘써 따라올 것이요, 다시 뒤로 물러간 것을 보면 안심하고 빨리 쫓지를 아니 하겠기에 그들을 안심시키고 빠져가자는 계책이었다.
한참 도로 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어떻게 넘었는지 그 산을 넘어서니 그 아래는 청인(淸人)의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으로 치면 이장(里長)의 집에서 계(契)를 하느라고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피흘리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 부대 조각으로 싸매 주었다.
이 때 나에게 총을 쏜 청년들은 그대로 나를 쫓아왔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총을 쏠테면 쏘아라.」
하고 대들었으나, 그들은 어쩐 일인지 총을 쓰지 않고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한용운전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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