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서의 어람관음과 보타산의 볼공관음

섬서의 어람관음과 보타산의 볼공관음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신앙설화

• 주제 : 신앙
• 국가 : 중국
• 시대 : 당나라
• 참고문헌 : 불교설화대사전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12년(817)때 섬서(陝酉)지방 사람들은 성질이 난폭하여 도의심이 전혀 없어 간탐 · 질투 ·살인 등 사악만을 일삼는 무법 지대였다.
그런데 어느날이 지방 금사탄(金沙灘)위에서 바구니에 생선(生鮮)을 담아 파는 어람미인(魚藍美人)이 나타났다.
그녀는 절륜(絶輪)한 미인이었는데 고을 청년들은 서로 다투어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어람미인은 청혼해 온 많은 청년들에게 관음경을 나누어주며
「이 관음경을 하룻밤 사이에 다 외우는 이를 남편으로 섬겨 모시겠다.」
고 약속했다.
이튿날 아침에 이 경을 외운 청년이 수 십 명이나 되었다.
그녀는 말하되,
「내 한 몸으로 어떻게 여러 남자를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하룻밤 사이에이 금강경(金剛經)을 외우시오.」
하고 권했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의 앞에서 외워낸 청년이 10명이나 되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10명에게 이번에는 법화경(法華經)을 나누어 주며 사흘간에 이 경을 다 외우는 분을 남편으로 섬기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약속한 날 아침에 그녀의 앞에서 법화경을 외워낸 이는 마(馬)씨라는 청년이었으니, 즉 마랑(馬郎)뿐이었다.
그래서 마씨는 만단준비를 갖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녀는 식장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슬픔을 깨물고 장의를 치른 지 백일이 지난 뒤에 한 노승(老憎)이 와서
「미녀가 바로 관세음보살의 화현일 것이라.」
고 이르자 마랑은 무덤을 파 보았는데 향내가 진동하고 관속에는 오직 황금빛 연쇄골(蓮鎖骨)만 있을 뿐이었다.
이때 노승이 말하되
「이는 관세음보살이 시현(示現)하여 중생을 교화한 성적(聖跡)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이내 공중으로 사라졌다.
그 후 이 고을사람들은 사악한 모든 부도덕을 물리치고 평화로운 정토(淨土)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어람(魚監)관음의 연기이다. 이 「어람관음」은 33관음중의 한 관음이다.

중국의 관음도량 즉 보타락가(補陀落迦)는 절강성 정해현(凉江省 定海縣) 주산열도(舟山列島) 섬중의 보타산(補陀山)이다.

이 보타산은 중국의 4대성지(四大聖山)의 하나인데 산서성(山西省) 오대산(五臺山)은 대지문수(大智文殊) 도량이요, 사천성(四川省) 아미산은 대행보현(大行普賢) 도량이요, 안휘성(安微省) 구화산(九華山)은 대원지장(大願地藏) 도량이요, 이 보타산(補陀山)은 대비관세음(大悲觀世音)의 도량이다.
이 보타산을 관세음보살이 친히 유행지로선택해서 관음도량으로 개산(開山)한 연기설화가 있으니,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 즉 가기를 싫어한 관음을 모신 절에 대한연기 설화다. 중국 5대 후양(後) 정명(貞明) 2년(916)때의 일이다.
일본승(日本僧) 혜악(慧鑑)화상이 정법을 구하는 유학승으로서 양나라에 들어가 도승을 찾고 도(道)를 배웠다.
화상은 성지를 두루 편력하다가 하루는 산서성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의 도량에 이르러 참배하고 그 승지를 두루 참관하다가 한 관음대사의 성상이 거룩하게도 청정하게 장엄되어 있음을 친견하고 순간적으로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일어났다.
혜악화상은 곧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행장을 꾸려 관음성상을 몰래 추심(推尋)한 뒤에 오대산을 떠나 배를 타곤 귀국 길에 올랐다.

배를 항해하여 절강성 정해현(定海縣)에 소속되는 주산열도의 여러 섬 가운데 있는 신라초(新羅礁)라는 곳에 이르니 바다가운데서 쇠로 생긴 연꽃들이 솟아올라(지금은 연꽃 바다라 한다) 배의 항로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혜악화상은 이를 헤쳐 가려고 밤이 되면 정지했다가 날이 새면 배를 젓기를 4일간이나 되풀이하여 헤맸으나 오직멀리 보타산만 보일 뿐 배는 연꽃에 밀려 감돌기만 하였다.
급기야 혜악화상은 성상 앞에 나아가서 엎드려 기원하되.
「대성관세음보살님이시여! 미련한 제자가 거룩한 성상을 뵈옵고 우리나라에는 불법이 두루 선전이 안 되었으므로 모시고 가서 봉공선전(奉供宣傳)하려고 하였사오나 이와 같이 조난을 당해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사오니 우리나라 중생들이 성상을 뵈올 인연이 미숙하기 때문인가 하옵니다.
원하옵건대 보살님께서 가시고 싶은 곳으로 가시면 제자가 모시고 따라가서 그곳에 법당을 짓고 성상을 모시고 봉공하겠나이다.」
이렇게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더니 마침내배가 떠나가게 되어 보타산(補陀山) 조음동에 이르러 배가 조용히 닿으므로 혜악화상은 이곳이 연토라 생각하고 내렸다.
혜악화상은 곧 인가(入家)를 찾아 헤매다가 조음동에서 멀지 않은 산 변두리에 일간초옥을 발견하고 주인을 찾으니 고기잡이어부 장(張)씨 영감이었다.
장씨는 혜악화상으로부터 그동안 겪은 사연을 자세히 듣고 크게 감동하여.
「보살님께서 일본에 갈 뜻이 없고 이 외로운 섬 산중에 계시려 하니 이곳이 바로보살님이 계신 연토(緣土)인가 합니다.
우리 고장 백성들에게 큰 복덕과 선근이 내렸습니다 그려! 스님이시여! 귀국 백성들이 보살님을 뵈올 인연이 없어서 이 섬으로 오셨으니 스님께서 우선 암자라고 짓고 보살님을 봉공하십시오.
제목은 비록 늙었지만 성시(城市)를 돌며 권선하면 여러 신도들이 와서 보살님께 예배드리고 스님께도 공양을 올리게 될 것이오니 염려 마시고 일본에 돌아갈 생각은 아예 단념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혜악화상은 하는 수 없이 귀국할 생각을 아주 단념하고 이 산에 암자를 짓고 관음시자로 있게 되었는데 절 이름은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이라고 붙였다.
이로써 혜악화상은 보타산의 제 1대 개산조사(開山祖師)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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