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노동자대투쟁

87년노동자대투쟁

[ 八七年勞動者大鬪爭 ]

시대명 현대

1987년 이후 7월부터 9월까지 전지역과 업종에 걸쳐 폭발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투쟁.

6월항쟁의 과정을 통해 고양된 민주화 열기는 이후 노동자들의 생존권확보 및 조직결성 움직임으로 분출, 7월 5일 노조 불모지대였던 현대그룹에서 현대엔진이 노조결성에 성공한 데 이어 7월 16일에는 현대미포조선 노조결성 신고서류 탈취사건이 발생, 회사 측이 전국민적인 지탄을 받는 가운데 파업투쟁은 독점대기업의 사업장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7월 하순 영남권으로 확산된 투쟁은 (주)통일을 중심으로 마산·창원의 대공장을 휩쓸면서 8월 17·18일 4만여 명이 참여한 울산 현대그룹 노조연합가두시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부산으로 확산된 파업투쟁은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가두시위과정에서 8월 22일 이석규가 직격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으로 발전하면서 <이석규열사 민주국민장>을 계기로 수도권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투쟁은 수도권의 중소기업·비제조업 등으로 확산되어갔지만, 8월 11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과 <공권력개입 요청>을 계기로 정부의 물리적 개입과 이데올로기 공세가 강화되면서 투쟁의 파고는 9월부터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소강상태로 빠져든 8월 말부터 운수·광산·사무·판매·서비스·기술직 등 비제조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9월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7월에서 9월까지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의 연인원은 2백만, 파업 건수는 3,300건에 달하며, 1,200여 개의 신규노조가 결성되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무려 3개월 동안 전지역·전산업에 걸쳐 일어난 최대규모의 노동자 대중투쟁이었으며, 대부분 노동법의 울타리를 넘어서 을 관철시키는 탈법투쟁, 가두시위로 발전, 격렬함에 있어서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87년투쟁은 이후 의 건설로 이어지는 자주적인 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시키는 근원지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결성된 신규노조들은 민주노조운동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관련이미지

87년 여름의 노동자 시위.

87년 여름의 노동자 시위.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연관목차

1230/1295
4. 산업구조조정과 독점자본의 재편
5. 8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87년노동자대투쟁 지금 읽는 중
6. 80년대 학생운동과 재야단체
7. 북한의 개방 움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