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점거농성사건

건국대 점거농성사건

[ 建國大占據籠城事件 ]

시대명 현대
연도 1986년

1986년 10월 28일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 전국 26개 대생 2천여 명이 건국대에 모여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발대식을 벌이다 교내로 진입한 3천여 명의 경찰에 밀려 본관·사회과학관 등을 점거, 나흘간 철야농성을 벌인 사건.

학생운동 지도부인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의 정책적 결정에 따라 대중조직으로 결성된 애학투는 유인물을 통해 △6·25는 민족해방투쟁이며, △해방 당시 찬탁은 통일과 해방을 보장한 것이었던 반면 반탁은 남녘땅을 미제 지배하에 귀속시키는 것이었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분단 이데올로기·식민지 이데올로기라는 등의 북한 측 주장과 같은 논리를 전개, 공안당국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정치적 탄압의 빌미를 주었다.

공안당국은 학생들의 철야농성을 <공산혁명분자의 건국대 폭력점거난동사건>으로 규정, 단전·단수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개시, 126개 중대 18,900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하고 최루탄을 쏘면서 소방차 30대와 헬기까지 동원, 1,525명을 연행하고, 이 중 1,295명을 구속함으로써 세계학생운동사상 최대규모의 구속자를 냈다. 10월 10일과 14일의 서울대 대자보사건과 건국대 점거농성사건의 연이은 타격으로 구학련은 사실상 해체상태에 이르렀으며, 학생운동권의 공동화 현상이 빚어졌다.

사건 직후 학생운동권은 자체반성을 통해 ①정세판단의 오류와 그로 인한 과다한 역량 손실 ②지식인적 조급성이 초래한 좌편향 ③허약한 대중적 기반 위에 무리하게 정치투쟁조직을 건설하려 했던 점 등을 비판하고, 대중노선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는 한편 각계각층과의 연대속에 운동의 통일성을 기하려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87년 민주화투쟁에서는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투쟁을 이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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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연행되는 건대농성 학생들.

경찰에 연행되는 건대농성 학생들.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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