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파업투쟁

현대중공업 파업투쟁

[ 現代重工業罷業鬪爭 ]

시대명 현대

1988~89년과 90년 초 2차례에 걸쳐 당국의 공권력투입으로까지 발전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파업투쟁.

88년의 파업은 6월 9일부터 시작된 회사 측과의 단체교섭이 최종 결렬된 12월 18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외견상 평온하게 진행되던 파업은 89년 1월 8일 이원건 위원장을 비롯한 현대중공업 노조간부들이 합숙하던 석남사와 <현대해고자 복직실천협의회> 사무실에 대한 회사 측의 테러사건이 발생하면서 급진전, 2월 13일 현대그룹 연대투쟁본부가 구성되고, 2차 테러(2·21)이후인 3월 2일에는 <현대중공업투쟁 범국민지원대책회의>가 발족됐다.

투쟁의 확산을 우려한 정부는 3월 30일 1만 4천의 병력을 동원, 육·해·공 3면 입체작전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작전으로 파업을 강제해산시켰으나, 이를 계기로 울산 현대노동자·가족·시민과 경찰의 치열한 시가전으로 발전, 이후 10여 일 동안 울산시내 전역은 화염병과 최루탄 공방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안으로 내연하던 현대중공업투쟁은 90년 들어 또다시 재연, 4월 25일 이영현 위원장·우기하 수석부위원장 등 지도부에 대한 연이은 구속사태가 발생하자 현대중공업 노조는 이에 항의, <구속간부에 대한 고소고발 철회>를 요구하며 전면적인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정부는 5월 1일 메이데이 투쟁을 앞둔 시점에서 파업확산을 막기 위해 4월 28일 또다시 1만 8천 명의 대병력으로 육·해·공 진압작전을 펴 수백 명의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집행부를 비롯한 1백여 명의 노조원들은 현대중공업 내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요구관철시까지 계속투쟁>을 선언, 20여 일 동안 경찰과 대치하며 악전고투했으나, 환자발생, 연락두절 등의 문제로 자진해서 농성을 풀고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90년의 현대중공업파업은 5월 1~4일에 걸친 전노협의 메이데이 총파업으로 이어지면서 89년에 이어 다시 전국적인 노동자투쟁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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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산업구조조정과 독점자본의 재편
5. 8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6. 80년대 학생운동과 재야단체
7. 북한의 개방 움직임
개정/보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