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미군정

[ 美軍政 ]

시대명 현대
연도 1945년 ~ 1948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9월 8일 북위 38도 이남에 진주한 미군이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 3년간 남한지역에 실시한 군사통치. 하지 중장 지휘하의 미육군 24군단이 9월 8일 인천에 상륙, 서울에 들어와 9일 38도 이남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한 데 이어 12일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정체제를 갖추었다. 군정실시에 필요한 준비와 사전지식을 갖추지 못한 채 남한지역에 진주한 미군 당국은 과거 식민지였던 지역에 군정을 실시함에 있어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정책을 추진, 인민공화국과 중경(重慶) 임시정부는 물론, 미 군정 외의 어떤 권력기관도 인정치 않았다.

그리하여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인민위원회·치안대 등 각종 자치기구들을 강제로 해체시킨 미 군정청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가 남한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데 매우 적합하다고 보고, 그 통치기구와 조선인 행정관리들을 그대로 인계받아 통치했다. 또한 서구적 가치관을 갖고 영어를 잘하는 지주출신의 보수적 인사들을 행정고문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사실상 과거의 친일관료·경찰·지주 등 반민주적 인사들의 재등용 과정이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김구와 임시정부 인사들도 여기서 배제되었다. 미 군정은 치안유지법·사상범예방구금법 등 일제가 만든 악법들을 폐지했으나 신문지법·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점령통치에 활용했다. 결국 질서유지와 효율적 통치라는 명분으로 실시된 미 군정의 점령정책은 식민지 잔재의 완전한 청산을 요구한 민중과 독립운동세력들에게는 타격을 가한 반면, 친일세력에게 유리한 입지를 마련해주는 반역사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전국적인 혼란상을 빚는 가운데 좌익세력인 공산당·인민당·신민당이 합당,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南勞黨))을 결성하고(1946. 11. 23), 우익진영에서는 김성수·송진우·장덕수 등을 중심으로 45년 9월 한국민주당을 조직했으며(1945. 9. 16),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김구가 영도하는 한국독립당도 국내기반 확정에 나서는 등 혼란한 정국이 조성되었다. 우익진영의 정당·단체들은 45년 10월 16일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이승만을 중심으로 좌익세력에 대항했고, 건국 청년회·서북 청년회 등 우익청년단체의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동안 김규식·여운형이 주동이 되어 좌·우익 합작을 시도한 적도 있으나 아무 성과도 없었으며, 미 군정에 의해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이어 여운형이 암살됨으로써(1947. 7. 19) 좌익과 중도세력은 차츰 몰락하고 말았다.

한편 미 군정 당국은 46년 2월 한국 지도자 38명으로 민주의원(民主議院)을 구성, 군정의 자문에 응케 한 데 이어, 46년 12월에는 관선·민선의원 90명으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발족시켰으며, 47년 2월에는 미국인 군정장관 밑에 민정장관의 직을 두어 안재홍을 임명하고, 그해 6월에는 군정부의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라고 바꾸었다. 이 군정치하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유엔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를 준비, 남한지역에만 실시하여(1948. 5. 10)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1948. 8. 15) 만 3년에 걸친 미 군정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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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군정과 친일파의 득세
미군정 지금 읽는 중
2. 남한단독정부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