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분단과 독재체제의 출범

민족분단과 독재체제의 출범

1945년에서 1961년까지

시대명 현대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드디어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획득했다. 해방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당시 사회발전과 민중의 자유로운 삶을 가로막고 있던 식민지적 지배구조와 낡은 봉건적 유산들을 타파하고 민중이 주체가 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우리 역사의 경로는 외세의 영향하에 남북으로 나뉘는 분단의 길로 나아갔다. 특히 남한의 경우 미국의 일방적 이해에 의해 과거의 친일파세력들과 에 의한 친미반공 독재국가의 등장이라는 왜곡된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8·15에서 에 이르는 우리 역사의 흐름은 외세에 의존한 분단고착적인 독재권력의 지배의 역사이자 이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북은 소련이, 그 이남은 미국이 의 형식으로 해방 직후부터 약 3년간 통치했던 미·소의 군정기간은 우리 역사의 행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시기였다. 해외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된 임시정부와 국내의 좌익과 좌우의 중도세력, 민족주의 계열의 다수 인사가 참여하여 조직한 를 모태로 한 은 일제 및 민족반역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주요 생산기관을 국유화하며 몰수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배하는 것을 시정방침으로 제시하여 당대 민중들의 정치적·경제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 미 군정은 임시정부나 국내에서 수립된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과거의 친일파세력을 다시 군정요직에 등용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고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내세워 남한 단독정권 수립으로 나아가는 자국의 이해에 충실한 정책을 취했다. 미 군정이 실시한 나 또한 실상은 미국의 남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미국의 대한반도전략의 일환이라는 성격을 지녔다. 미 군정 시기는 미국에 의한 친미반공국가의 수립을 위한 정지작업기였던 것이다.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46년 초 ·이승만을 중심으로 반탁운동이 고조되고, 좌익계는 을 결성하여 모스크바 회담을 지지하는 운동이 일어나 찬·반탁을 중심으로 좌우가 갈라선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계의 남한단독정부 주장이 등장하고 한반도의 분단화가 노골화됨에 따라 좌우의 중도파를 중심으로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46년에 이, 48년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47년 미소공동위원회의 실질적인 결렬과 좌우합작운동의 좌익 쪽 중심인물인 의 암살, 그리고 48년 미국의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포기 및 한반도문제의 유엔에로의 이관을 통한 남한단독정부의 수립결정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미 군정을 반대하고 식민지잔재와 봉건적 유제를 철폐하고 철저한 개혁(특히 )과 통일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인민공화국을 지지했던 는 경성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발로 46년 9월에 총파업을 단행하여 미 군정에 대립하는 전국적인 정치운동으로 나아갔다. 이에 호응하여 당시 지방에서 민중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를 거점으로 대구로부터 전역으로 대규모 민중항쟁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10월폭동이다. 48년에는 미국과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이 격화되었는데, 이러한 투쟁은 유엔한국위원단 반대, 미·소양군 철수를 주장하는 제주도 민중들의 봉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5년간이나 지속된 제주도 민중항쟁은 3, 4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미 군정과 이승만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당시 민중들의 투쟁은 직·간접적으로 (46년 남로당으로 개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지만, 개혁과 통일정부를 바라는 민중들의 요구가 이러한 투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며, 38도선 이북에서는 46년 초 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후에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거쳐 48년 9월 9일 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로써 좌우의 분열과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이라는 조건 속에서 외세에 편승한 정치세력의 책동에 의해 한반도는 분단국가라는 비극적 출발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비호와 김성수계의 친일적인 세력(), 그리고 이승만이 중심이 된 친미세력이 반공의 기치하에 수립한 새 정부는 해방시기 부여된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사회의 제모순을 그대로 안고 출범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주와 민주와 통일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거센 투쟁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분단이 빚어낸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남한내의 정치·사회경제상의 혼란과 남북한의 에 입각한 통일 논리는 남북한 합하여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낸 채, 세계체제간의 국제적인 냉전질서의 구축과 전쟁경기를 이용한 의 경제적 성장과 재군비의 강화, 이승만의 극단적인 반공논리에 의한 독재권력의 강화와 분단상황을 더욱 고착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이승만정권은 미국의 정치적 영향과 경제에 의존한 채 정적에 대한 테러적 탄압과 민주적·진보적 대중운동이나 그 지도자들을 빨갱이로 몰면서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로 나아갔다. 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선거는 부정선거·부패선거로 얼룩져 급기야 민중들의 거센 투쟁에 의해 이승만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은 무엇보다도 이승만 독재정권의 타도가 직접적인 목표였지만, 독재 권력의 타도 이후에는 혁신계와 학생들이 중심이 된 으로 발전하여 해방공간에서 달성하지 못한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포괄적인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과 독재정권출현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인식의 미숙과 주도세력의 한계와 정부의 무능에 의해 미완의 혁명으로 그치게 되었다.

민주당이 집권한 제2공화국은 신·구파의 양당분열과 개혁 의지의 부재로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채 무능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5·16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이후 우리 역사는 군사독재정권과 4월혁명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민중들의 새로운 투쟁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