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박헌영

[ 朴憲永 ]

박헌영

박헌영

시대 현대
출생 - 사망 1900 ~ 1955
직업 공산주의 운동가

공산주의 운동가. 충남 예산 사람. 1919년 경성고보를 졸업하고 3·1운동 후 상해로 건너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후, 김단야(金丹冶)·임원근(林元根)과 함께 국내 침투를 시도하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출옥 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하고, 25년 4월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데 이어 다음날 고려공산당청년회를 결성했다. 조선공산당은 창당 7개월 만에 대부분의 간부가 체포되어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때 체포된 그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나 소련으로 탈출했다.

소련에서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정치교육 과정인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2년간 교육받은 후 33년 다시 상해로 와서 국내로 침투하려다 체포되었다. 39년 대구형무소에서 나온 후 전남 광주시 백운동의 벽돌공장 인부로 위장, 은신하다가 8·15를 맞았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연합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승만김구를 주석과 각료에 추대하고 미군진주에 대해 환영성명을 냈으며, 미군사령관 하지를 만나 협조할 뜻을 표명했다. 이것이 후일 그의 숙청 때 논죄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공산당 활동도 용인하지 않았다. 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으며, 조선공산당은 이에 맞서 9월 총파업·대구 10월 항쟁을 일으켰다. 46년 11월 조선공산당·인민당·신민당 좌파가 연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을 결성, 박헌영은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미 군정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진 가운데 46년 9월 남한을 탈출, 입북하여 남로당을 지도하면서 금강정치학원에서 게릴라를 양성했다.

그러나 남로당의 핵심인물인 김삼룡(金三龍)·이주하(李舟河)가 체포되면서 남로당의 활동은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53년 전선이 고착되고 휴전이 임박해지면서 김일성에 의해 이승엽(李承燁) 등이 체포·기소되고, 박헌영에 대한 군사재판은 55년 12월에 열렸다. 그에 대한 죄목은 19년 CIC(CIA 전신) 요원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접선했으며, 25년 일경에 체포된 후 조직을 배신, 밀정행위를 하고, △해방 후에는 미국에 매수되어 극좌적인 투쟁으로 혁명역량을 파괴했으며, △반당종파주의자로서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50여만 당원이 전시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정권전복을 위해 쿠데타 음모를 했다는 등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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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군정과 친일파의 득세
박헌영 지금 읽는 중
2. 남한단독정부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