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 建國準備委員會 ]

약어 건준(建準)
시대명 현대

1945년 8월 15일 조직된 정치단체. 정식명칭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약칭은 건준(建準). 8월 14일 의 무조건항복이 결정되자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는 80만 일본인의 안전과 재산보호, 10만 일본군대의 철수 등 항복 후 사태를 염려하여 저명한 한국 지도자에게 행정권을 넘기고자 했다. 총독부는 을 그 적임자로 보았으며, 이미 일본의 패전을 확신하면서 을 결성, 이후의 사태에 대비해온 여운형은 이를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 즉시석방, 경성에 3개월분의 식량확보,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간섭치 말 것. 학생 및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치 말 것. 조선 내 각 사업장의 일본인 노무자를 우리 건설사업에 협력시킬 것」.

총독부가 이 조건들을 수락하자, 해방 당일 건국동맹위원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17일 부서결정을 마치고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 총무 최근우(崔謹愚) 등이 선임되었으며 25일 선언과 강령을 발표했다. 건준은 치안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총역량의 일원화, 교통·통신·금융·식량대책 강구를 목표로 하여 반민족적 친일세력을 제외한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좌우연합의 일종의 통일전선체였다. 여기에 불참한 것은 를 비롯한 일부 우익 진영이었다. 일제하에서 민족개량주의를 부르짖고 친일경력을 가진 지주 세력인 이들은 <임시정부 봉대>를 내세우며 참여를 거부, 후에 한민당(韓民黨)을 결성했다. 건준은 설립목적을 알리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로부터 치안유지권 및 방송국·언론기관 등을 이양받았다.

그런데 총독부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행정권 이양을 취소하고 경찰서·신문사·학교 등을 다시 접수했다. 이는 미군선발대가 비밀리에 서울에 와서 「일본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도 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준의 활동은 계속되어 8월 말까지 전국에 지부로서의 가 145개 세워졌으며, 당시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유일한 전국적 정치세력을 형성,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 전인 9월 6일에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경기여고에서 열고, 국호를 이라 결정함과 아울러 이날 정부 각료 명단을 발표하기까지 했으나 우익진영에 의해 벽상조각(壁上組閣)이라고 비난받았다. 게다가 내부에서 좌익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하고, 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건준조직은 자연 해체되었다.

8∙15 직후 건준의 벽상조각표

8∙15 직후 건준의 벽상조각표
주     석

이승만

부 주 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   헌

내무부장

김   구

외무부장

김규식

군사부장

김원봉

재무부장

조만식

사법부장

김병로

문교부장

김성수

체신부장

신익희

관련이미지

건준을 결성 후 감격을 억누르며 군중 앞에 나타난 여운형(1945.8.16).

건준을 결성 후 감격을 억누르며 군중 앞에 나타난 여운형(1945.8.16).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동의어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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