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탁·반탁운동

찬탁·반탁운동

[ 贊託反託運動 ]

시대명 현대

해방 직후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일어난 좌우익의 대립. 의 내용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45년 12월 27일로서, 최초의 미국발 보도는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며, 소련은 탁치를 주장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과 정반대될 뿐 아니라, 탁치와 독립을 은연중 대치시키는 내용이었다. 이에 와 임시정부계는 반탁·즉각독립을 내걸고 반탁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과도정권 수립>을 천명하면서 미 군정까지 부인하고 정부를 자처했다. 이러한 반탁 운동은 민족감정을 자극,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정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던 좌익세력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통일위원회 설치를 제의했으나, 임시정부는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통해 통일공작을 추진하자」고하여 결렬되었다. 그러자 인민 공화국과 은 46년 1월 2일 3상회의 지지를 공식적으로 밝혔으며, 2월 15일 (민전)을 결성, 좌익만의 통일전선을 이루었다.

한편 우익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준비회를 열고, 의 가 이에 합세, 좌익이 불참한 가운데 비상국민 회의를 개최했다. 이로써 좌우분열은 극에 달했다. 사실상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및 그를 통한 독립>이라는 내용이었으나, 이를 둘러싸고 반민족친일 세력·민족세력간의 대립구도가 좌익·우익간의 대립구도로 바뀌고, 김구 등의 통일정부수립 노력이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노선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결국 신탁통치안은 친일분자 및 우익세력에게 도덕적 명분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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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반대 시위

신탁통치반대 시위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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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군정과 친일파의 득세
찬탁·반탁운동 지금 읽는 중
2. 남한단독정부 수립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