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

남당

[ 南堂 ]

시대명 고대/삼국

삼국시대의 부족 집회소가 발전하여 틀을 잡은 중앙관청, 도당이라고 하기도 한다. 남당의 기원은 원시사회의 공동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씨족공동체 사회의 씨족회의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국가기구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남당에는 왕과 신하들의 좌석을 구별하는 표시인 궐표가 있어 왕이 제일 윗자리에 앉고 관계에 따라 신하들이 앉았다. 초기에는 귀족의 협의체기구로서 군신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기능을 했으며, 결정방식은 만장일치제를 채택했다. 고대국가의 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행정적인 기능보다는 연회나 기타 의식을 행하는 형식적인 기능에 국한된 것으로 보인다. 의 화백제도가 그 좋은 예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251년(점해왕 3)부터 궁궐 남쪽에 남당을 짓고 국가의 정사를 집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백제에서는 261년(고이왕 28)에 왕이 남당에 참석하여 정사를 집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초기의 남당은 정사를 논한다든지 행정사무를 처리, 집행한다든지 연회나 제사의식을 집행하는 기능을 주로 했으나 국가 통치 질서가 정비되어 가면서 행정실무가 새로운 부서로 분리되어 가게 되어 점차 군신간의 형식적인 회견이나 의식을 집행하는 기능만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남당의 유풍은 고려시대의 (都兵馬司), 조선시대의 (備邊司)와 같은 합좌기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