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지인

송양지인

(나라 송, 도울 양, 조사 지, 어질 인)

[ 宋襄之仁 ]

요약 송나라 양공의 어짊. 제 분수도 모르면서 남을 동정하는 어리석은 어짊을 일컬음.

춘추시대에 송(宋)나라는 꽤 강력한 제후국이었습니다. 특히 양공의 치세 무렵 송나라는 융성했는데, 그러한 상황에 고무된 양공은 내친 김에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였습니다. 패자란 제후국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연 제후를 가리키는데, 제후국들을 소집할 정도의 힘을 확보해야만 가능했습니다. 춘추시대에는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여 다섯 패자가 있었는데, 제(齊)나라 환공, 진(晉) 문공, 초(楚) 장왕, 오(吳)왕 부차, 월(越)왕 구천을 가리키기도 하고,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 대신 진(秦) 목공, 송(宋) 양공을 넣기도 합니다.

송 양공은 패자가 되고자 노력했으나 초나라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두 나라는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홍수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대치할 무렵이었습니다. 송나라가 먼저 진을 치고 기다릴 무렵 초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공자 목이가 즉시 공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양공은 “상대가 미처 준비를 하기 전에 기습하는 것은 인(仁)의 군대가 할일이 아니다.” 하며 공격을 반대했습니다. 이어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 진을 치기 시작하자 다시 공자 목이가 공격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양공은 같은 이유로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초나라 군대가 전열을 갖추자 그때서야 공격 명령을 하달했고, 병력이 약한 송나라는 대패하고 말았으며 양공 또한 부상을 입은 후 병세가 악화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자신의 처지도 모르면서 베푸는 어짊을 가리켜 세상 사람들은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부르며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맹자는 이러한 양공의 자세야말로 진정 어진 이의 표상이라며 회맹을 이루지도 못한 양공을 춘추오패에 선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