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아이시앵의 역사

카프아이시앵의 역사

가. 식민 이전

히스파니올라 섬의 원주민은 타이노 족(Taínos)이었다. 아라와크 족(Arawak)의 일족인 이들은 기원전 2600년경 현재의 베네수엘라 동부에서 배를 타고 섬에 다다랐다고 알려져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이 섬을 발견한 1492년에 이 지역은 타이노 족의 일족인 자라구아 족(Xaragua)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지금의 카프아이시앵 동쪽 해안에 ‘라나비다드(La Navidad)’ 요새를 건설한 후 에스파냐는 섬을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많은 원주민은 질병과 강제 노동으로 사망하였다. 이 지역의 발견 당시 원주민의 인구는 약 40만 명에 이르렀지만, 에스파냐 인이 섬에 도착한 지 30년 만에 멸족하게 되었다.

나. 식민 시대

에스파냐 총독은 히스파니올라 섬의 원주민 지도자를 제거한 후, 해안 가까이에 마을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 마을은 곧 버려졌는데, 이는 프랑스 탐험가와 영국인들에 의해 발생한 화재 때문이었다. 1606년에 에스파냐 인들은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약 50여 년간 이 지역의 인구는 빠르게 줄었고, 일부 해적들의 근거지로만 이용되었다. 이후 1650년대에 프랑스 해적들이 현재 토르티(Tortue) 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에스파냐와의 전투 이후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Vrede van Rijswijk)으로 프랑스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지배권을 얻게 되었고, 동쪽 3분의 2는 에스파냐가 통치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식민 지역을 ‘생도밍그(Saint-Domingue)’라 이름 짓고, 1711년에 지금의 카프아이시앵(Cap-Haïtien)인 카프프랑세(Cap-Français)를 수도로 정하였다. 약 60년 후인 1770년에는 수도가 다시 포르토프랭스로 옮겨지게 된다. 카프아이시앵은 수도 건설 이래 일어난 여러 차례의 화재와 폭동, 그리고 1751년과 1770년의 지진 등으로 시가지가 파괴되는 일이 거듭되었다.

18세기 말 북부 평야 지대에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이 건설되고, 이를 위해 수십만 명의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들여왔다. 수도인 카프프랑세 또한 도시 규모가 확대되면서 1790년에는 15,000명 정도가 거주하게 되었다. 1791년 8월에 노예 폭동이 발생하였고, 1793년에는 노예 제도 폐지를 선언하고, 6개월 후 프랑스 본국에서 이를 승인하였다. 노예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카프프랑세에는 백인 농장주와 결합한 자메이카의 영국군과 에스파냐군이 상륙하였다. 이에 프랑스에서 파견된 프랑스군과 흑인 노예 부대가 영국과 에스파냐 연합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

다. 독립 이후

1803년에 카프프랑세 교외에서 일어난 베르티에르 전투(Bataille de Vertières)에서 흑인 노예 부대의 지도자인 장 자크 데살린(Jean-Jaques Dessalines)이 승리를 거두고, 1804년 1월 1일에 고나이브(Gonaives)에서 흑인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아이티의 독립을 이끌었던 데살린은 스스로 자크 1세로 즉위하였다. 황제가 된 데살린은 앙리 크리스토프(Henry Christophe)에게 카프아이시앵의 28㎞ 남서쪽에 있는 라페리에르(La Ferrière) 봉과 앙리 봉에 거대한 요새 건설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1806년에 자크 1세가 반란군에게 살해되고, 아이티는 북부의 왕국과 남부의 공화국으로 분열되었다. 남부의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는 알렉상드르 페티옹(Alexandre Pétion)이 이끄는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흑인 지도자인 앙리 크리스토프가 이끄는 북부는 1806년에 카프아이시앵의 동남쪽 19㎞에 자리한 밀로트(Milot)를 수도로 결정하였다. 1811년에 앙리 크리스토프는 스스로 앙리 1세로 즉위한 후,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상수시 궁전(Palais Sans Souci)과 성벽을 건축하기도 했으나, 오랜 독재 끝에 반란이 일어나자 1820년에 자살하였다.

1821년에는 독립을 선언하고, 1822년에는 에스파냐와 전투 중이던 도미니카 공화국을 점령한 후 1844년까지 지배하였다. 프랑스는 1825년에 약 1억 프랑의 배상금을 수령하는 조건으로 아이티의 독립을 승인하였으며, 영국도 1883년에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후 20세기 초까지 내분이 계속되자 이를 구실로 미국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1915년 아이티를 보호령으로 삼고 1934년까지 군사 점령을 계속하였다. 카프아이시앵의 도로명은 미국 지배 기간에 받은 영향이 나타나 있는데, 남북 방향의 도로는 알파벳으로 표시하고, 동서 방향의 가로(街路)는 숫자로 표시하는 것 등이 남아 있다.

1990년 선거를 통해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4년 카프아이시앵은 대통령에 반대하는 반정부 무장 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카프아이시앵을 중심으로 반정부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사임하고, 중앙아프리카로 망명하였다. 혼란이 가중되면서 국제연합(UN)의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 프랑스, 캐나다, 칠레 등 다국적군 약 5,000명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다. 2004년에 보니파스 알렉상드르(Boniface Alexandre) 대법원장이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연관목차

884/1205
22. 도미니카 공화국
23. 아이티
24. 바하마
25. 자메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