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토프랭스의 역사

포르토프랭스의 역사

가. 식민 이전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을 발견하기 전에 이 섬의 원주민은 타이노 족(Taínos)이었다. 아라와크 족의 일족인 타이노 족은 B.C. 2,600년경 현재의 베네수엘라 동부에서 배를 타고 섬에 도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콜럼버스가 이 섬을 발견한 1492년에 이 지역은 타이노 족의 일족인 자라구아 족(Xaragua)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이웃 섬에 사는 카리브 족이 침범할 위협이 높은 해안가는 거주지로 삼지 않고 주로 사냥지로 이용했다. 당시 이곳의 원주민 인구는 약 40만 명에 달했지만, 에스파냐 인이 섬에 도착한 지 30년 만에 멸족하게 된다. 에스파냐 인이 섬을 지배한 1492년부터 1507년까지 100만 명의 원주민이 질병과 강제 노동으로 사망했다.

나. 식민 시대

원주민의 지도자를 제거한 후, 에스파냐 총독은 해안 가까이에 마을을 건설하고 ‘진실한 평화의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인 ‘산타마리아데라파스베르다데라(Santa Maria de la Paz Verdadera)’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이 마을은 곧 버려졌는데, 그 원인은 프랑스 탐험가와 영국인들이 일으킨 화재 때문이었다. 1606년 에스파냐 인들은 이 섬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약 50여 년간 이 지역은 인구수가 급감했고, 소수 해적들의 기지로만 이용되었다.

1650년대 들어 프랑스 해적들이 현재 토르티(Tortue) 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식민지가 확대되어 해안과 멀지 않은 이 지역에 정박지를 마련하게 되면서 ‘병원(Hôpital)’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다시 지배권을 주장하자 프랑스 해적단은 이에 저항했다. 에스파냐는 군대를 파견하여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1697년 라이스바이크(Rijswijk) 조약을 통해 섬의 서부를 프랑스령으로 인정했다.

프랑스는 식민 지역을 ‘생도밍그(Saint-Domingue)’라고 불렀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자 식민 당국은 해적들을 몰아내려고 했고, 이후 상당수 해적들은 농민으로 변신하여 이 지역 최초의 유럽 정착민이 되었다. 프랑스는 1749년 생도밍그의 수도 건설에 착수하여 고등 법원과 격자형 도로를 만들고, 옛 지명인 ‘병원(L'Hôpital)’으로 이름 붙였다. 그러나 곧이어 여러 차례의 화재, 폭동, 1751년과 1770년의 지진 등으로 기존 도시의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1770년에는 오늘날의 카프아이시앵(Cap-Haïtien)인 카프프랑세(Cap-Français)가 생도밍그의 수도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인 1793년 포르토프랭스는 ‘공화국의 항구(Port-Républicain)’라는 새 명칭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 식민 감독관 폴베렐(Étienne Polverel)은 이를 두고 “주민들이 프랑스 혁명이 부과하는 의무를 마음에 계속 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했다. 한편, 포르토프랭스는 1798년 영국 군대에 점령당하기도 했다.

다. 독립 이후

포르토프랭스는 18세기 말에 이르자 목화, 사탕수수, 커피 농장에 약 5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일하는 가장 번영한 프랑스령 식민지가 되었다. 1791년 8월 노예 폭동이 발생한 후 1793년에는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흑인들은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군과 싸우며 1804년 1월 1일 고나이브(Gonaïves)에서 흑인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독립을 이끌었던 장 자크 데살린(Jean Jaques Dessalines)은 스스로 자크 1세(Jaques Ⅰ)로 즉위하였다. 1806년 자크 1세의 암살 이후 아이티는 북부의 왕국과 남부의 공화국으로 분열되었다.

포르토프랭스는 알렉상드르 페티옹(Alexandre Pétion)이 이끄는 남부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북부 왕국에서는 흑인 지도자 앙리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가 앙리 1세(Henry Ⅰ)로 즉위하였고, 포르토프랭스를 ‘범죄의 항구(Port-aux-Crimes)’로 부르기도 했다. 앙리 1세는 집권 후 상수시(Sans-Souci) 궁전과 성벽을 건축하고 국가 경제를 발전시켰으나, 오랜 독재 끝에 반란이 일어나자 1820년에 자살하였다. 아이티는 1821년 독립을 선언하고, 1822년에는 에스파냐와 전투 중이던 도미니카공화국을 점령한 후 1844년까지 지배했다. 프랑스는 1825년 약 1억 프랑의 배상금을 수령하는 조건으로 아이티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영국도 1883년 독립을 승인했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 계속된 내분을 이유로 미국의 군사 개입이 시작되어, 1915년 아이티를 보호령으로 삼고 1934년까지 군사 점령을 계속했다. 미국의 지배 기간 동안 포르토프랭스에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활동이 집중되었다. 1956년에 전국적 총파업이 발생해 친미의 마글루아르(Paul Magloire) 정권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국의 지원하에 뒤발리에(Duvalier) 부자의 독재 정부가 들어서 국민들의 민주화 투쟁은 계속되었다. 이들 독재 정권 시기에도 포르토프랭스는 주거 환경 개선 등이 이루어지는 등 그 중심성이 강화되었다. 1990년 무렵에는 아이티 국가 지출의 80%가 포르토프랭스에 집중되었다. 도시의 인구는 폭증했고, 슬럼은 확대되었다.

1990년 역사상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가톨릭 신부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정치 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파나마로 망명했다가 다시 대통령이 된 뒤에도 선거 부정 의혹 등으로 여야가 극심하게 대립하면서 아이티는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맞았다. 2004년 아리스티드 정권에 반대하는 반정부 무장 세력이 아이티 북부를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사임 후 중앙아프리카로 망명했다. 이에 국제연합(UN)의 안전보장이사회가 미국, 프랑스, 캐나다, 칠레 등 다국적군 약 5,000명을 파견했다. 2004년 마침내 보니파스 알렉상드르(Boniface Alexandre) 대법원장이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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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엘살바도르
22. 도미니카 공화국
23. 아이티
24. 바하마
25. 자메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