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조운의 편리함에 관한 경기 감사 유사눌의 글

[조선 세종]조운의 편리함에 관한 경기 감사 유사눌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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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감사 유사눌(柳思訥)이 아뢰기를, ˝신이 생각하건대, 바다에서 운수하는 것과 육지에서 수송하는 것을 하나라도 없애서는 아니될 일이나, 선박의 용도가 육지에서 운수하는 것보다 갑절이나 편리한 것은, 용력은 적게 들고 공과를 거두는 것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성왕들은 대개 이 법을 취한 것입니다. 구주(九州)의 공(貢)바치는 것을 강(江)으로 띄워 바다로 해서 서울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우공(禹貢) 에서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국도(國都)는 그 위치가 큰 바다에 가까이 있으며, 한강(漢江)이 그 남쪽으로 흐르고, 벽란(碧瀾)이 그 서쪽에 있어서, 소통되도록 파내는 공역(工役)을 들이지 아니하여도 조운(漕運)의 이익이 또한 자연히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조정에서 말을 팔아서 그 값으로 들여오는 물건을 운반하는 군정(軍丁)의 인원수가 만여 명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며, 운수하는 노고와 양식을 가지고 다니는 비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서울에 사는 백성들의 수효는 1만 9천여 호에 지나지 아니하나, 그 사이에 탄목(炭木)과 곡초(穀草)를 수송하는 데에 장정들의 요역이 다른 여러 도(道)보다 갑절이나 많고, 더욱이 남북으로 사신들의 왕래가 낙역부절하여, 그들을 접대하고 공궤하는 데에 비용이 거의 빠지는 달[月]이 없으니, 민생들이 조잔(凋殘)하게 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제 말값[馬價]으로 들여올 베[布]와 비단을 모두 조읍포(助邑浦)에 두게 하여, 우도 수참선(右道水站船)으로 하여금 교동(喬桐)과 강화(江華)의 병선(兵船)과 함께 나누어 싣고서 조전(漕轉)하면, 이튿날이면 서울 서강(西江)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조전(漕轉)할 때에 만일 배를 타고 바람의 힘을 이용하였다가는, 실은 물건에 물이 들 염려가 있으니, 이것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나, 신은 생각하건대, 우도(右道)의 조전(漕轉)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시행하였으나, 자못 경복(傾覆)한 재앙은 없었는데, 어찌 유독 오늘에 이르러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심(聖心)으로 재결하시어 민력(民力)을 넉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 1월 20일(정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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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해운로

동해안 해운로 동해안 해운로는 우리나라 동해 최북단인 함경북도 나진시에서 부터 시작하여 각각의 주여 거점을 거쳐 부산 광역시 부산포에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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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해운로 통합 남해안 해운로는 부산광역시 부산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주요 거점을 거쳐 전라남도 해남 우수영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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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해운로 서해안 해운로는 전라남도 해남 우숭에서 시작하여 서해안 주요 거점을 거쳐 강화, 인천사이를 통과하고 이를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에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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