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전 조규

조전 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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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창(開倉) 발선(發船)〉 3도의 조창(漕倉)은 11월 1일에 처음 열어서 다음해 정월에 수봉하는 것을 마치고, 기한내에 발선(發船)하여 상납한다. 공충도는 2월 20일 이전에 발선하여 3월 10일 이내에 상납하고, 전라도는 3월 15일 이전에 발선하여 4월 10일 이내에 상납하고, 경상도는 3월 25일 이전에 발선하여 5월 15일 이내에 상납함. ○ 법전(法典)에는 위와 같으나 영남의 3창은 모두 2월 1일에 개창하여 수봉하기 시작하고, 거리의 원근(遠近)에 따라서 발선의 선후(先後)를 삼았으니, 후창(後倉)은 3월 13일로 하고, 좌창(左倉)은 15일로 하고. 우창(右倉)은 18일로 함. ○ 3창은 모두 경군(京軍)의 군보미(軍保米)가 있으므로 병사(兵使)가 친비(親裨)를 보내서 싣는 것을 감독함. 〈조선 실재(漕船實載)〉 조선 1척에 실지로 싣는 것은 양남(兩南) 1,000석, 호서(湖西) 800석으로 한정하고, 각 읍의 감관(監官)·색리(色吏)가 함께 배를 타고 읍마다 감관(監官) 1명, 배마다 색리(色吏) 1명·사공 1명·격군(格軍 : 선부(船夫)) 15명 배를 일제히 ˝종(綜)˝을 만들어 조선은 운항할 때마다 30척으로 1종(綜)을 만들어 도박(到泊)과 회발(回發)할 때에 앞서거나 뒤지지 못함 원산(元山)에서 현점(現點)하고 정종 기해(정조 3년, 1779년)에 수사(水使)의 장청(狀請)으로 혁파한 뒤에 다시 안흥(安興)에서 점검 받았다. 신해년에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의 장청에 의하여 안흥에서 현점하던 것을 혁파하고, 원산(元山)에서 봉점(逢點)하던 것을 복구하였으며, 공충도의 수우후(水虞侯)로서 영구히 차원(差員)으로 정하였음 연읍(沿邑 연로(沿路)의 군읍(郡邑))에서 호송한다. 각 읍은 그 지역 내의 서초(嶼草)와 험한 여울목에는 특별히 표(標)를 세우고, 수로를 익숙하게 아는 자로서 길을 인도해서 서로 전해 교대해 가는데 변장(邊將)이 없는 읍은 지방관(地方官)이 주관하고, 각 진(鎭)의 관할 내면 변강이 거행함. 〈험탄(險灘)〉 조로(漕路)가 험난하기로는 안흥(安興)의 관장항(冠丈項)·강화의 손돌목[孫石項]이 있는데 모두 돌뿌리가 준험하고 물결이 빠르고 굳세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는 배는 취재(臭載)될 염려가 많으며, 경강(京江)에는 근년부터 초서(草嶼) 풀등이 많이 생겨서 모래가 막히고 물이 얕아지므로 행주(幸州)의 염창항(鹽倉項)이 심함 큰 배가 통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운항하는 자가 이 세 곳에 도착하면 반드시 조수(潮水)가 성(盛)하기를 기다려서 물이 차오른 것이 두텁게 된 뒤에 비로소 배를 운행한다. 조후(潮候 조수가 드는 시간)는 그믐[晦]과 보름[望]에 조수가 생겨 상현(上弦)과 하현(下弦)에는 차차 감하여지기 때문에 조수가 생기는 것을 ˝살이[사리]˝라 하고 조수가 감하는 것을 ˝조금[조곰]˝이라고 함 조세선이 경강(京江)에 도박(到泊)하는 것은 그믐[晦日]이나 보름[望日] 이후에 많이 있게 된다. ○ 조수 때를 가리켜 보인 시[占潮詩]에, ˝삼토삼룡수(三兎三龍水), 삼사일마시(三蛇一馬時), 양삼원역이(羊三猿亦二), 월흑부여사(月黑復如斯).˝라 했다. 토(兎)는 묘시(卯時), 용(龍)은 진시(辰時), 사(蛇)는 사시(巳時), 마(馬)는 오시(午時), 양(羊)은 미시(未時), 원(猿)은 신시(申時)이고, 삼(三)·일(一)·가(二)는 일수(日數)를 말한 것이다. 단지 15일간만을 말한 것은 전망(前望)을 들어 후망(後望)을 미루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조강(祖江)의 조후가 이 시(詩)에 맞는다고 한다. 〈안흥 굴포(安興掘浦)〉 고려 인종(仁宗) 때에 의론(議論)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안흥정(安興亭) 밑의 해로(海路)는 많은 갈래의 흐름이 부딪치고 암석(巖石)의 험악함이 있으므로 소대현(蘇大縣)홍주(洪州) 을 통해 수로를 굴착(掘鑿)하여 통하게 하면 배를 운행하는 데 빠르다.˝고 해서 정습명(鄭襲明)을 보내 수천 명의 사졸(士卒)을 동원하여 굴착하게 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왕강(王康)이 헌의(獻議)하여 이미 굴착한 도랑[渠]을 파게 하였으나 물밑에 돌이 있고, 또 조도(潮道)의 진흙탕으로 인하여 사업을 마침내 성취하지 못하였다. 본조(本朝)에 신숙주(申叔舟)가 다시 굴착하였으나 역시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안흥(安興)의 굴포(掘浦)이다. 〈김포굴포(金浦掘浦)〉 효종 원년(元年 서기 1650년)에 김육(金堉)이 안흥에 포(浦)를 굴착하고 창을 설치하여 조로(潮路)를 순하게 하기를 청하였더니, 남이성(南二星)은 그것이 불가함을 상소하여 논하였다. 현종 무신(현종 9년 1968년)에 온천(溫泉)에 행행(行幸)하여 재신(宰臣)을 보내서 형편을 시찰케 하니, 이경휘(李慶徽)가 상소하여 반대하자, 일이 정지되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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