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송정의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 조운선의 숫자를 감하도록 하다

[조선 정조]송정의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 조운선의 숫자를 감하도록 하다

[ 松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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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次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정(松政)이 해이해진 것이 요즈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그 폐단의 근원을 따져보면 배를 만드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조선(漕船)을 만드는 것이 비록 중요한 정사이기는 하지만 역시 어찌 신축적으로 조절할 길이 없겠는가. 송정의 폐단을 구제하자면 조운선의 숫자를 감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원래 이 세상에는 단지 이만큼만의 수량이 있어서 배 한 척을 줄이면 배 한 척을 만들 만큼의 재목을 기를 수 있고 배 두 척을 줄이면 배 두 척을 만들 만큼의 재목을 기를 수 있다. 비록 배 한두 척만을 줄이더라도 그것이 송정에 끼치는 효과는 몇 그루나 될지 모르는데, 이것은 일조 일석에 시행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의 정사에 있어서는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의논은 어떠한가˝? 하니, 비국 당상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신은 전선(戰船)과 조운선을 통용하면 배의 숫자를 줄이는 방도가 될 것으로 여깁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아마도 다른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이병모는 아뢰기를, ˝지난번에 전선과 조운선을 통용하자는 뜻으로 통제사와 수사에게 물은 일이 있었는데, 회보가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정민시가 아뢰기를, ˝통제사와 수사는 보나마나 반드시 불편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묘당에서 결단을 내려 시행한 뒤에야 변통할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가 좌기(坐起)하였을 때 별도로 대책을 강구하여서 차후에 적어서 올리라. 요즈음 무신 재상들에 대한 일은 대체로 해괴하다. 지난번의 통제사의 장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옳지 않게 여긴다. 윤득규(尹得逵)에 대한 일은 몹시 무엄하다. 황해 병사에 대한 일도 역시 조정의 체모에 관계되는 것이다. 부사(副使)의 장계를 여러 날이 지난 뒤에 비로소 회계하면서 어물어물 얼버무리면서 시비를 가리지 않았는데, 묘당이 일개 수신(帥臣)에 대해 믿고 의지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당나라에서는 정관(貞觀) 이후에 오로지 무력만을 숭상하였는데도 이소는 회서(淮西)를 평정한 원훈(元勳)으로서 배도(裵度)를 맞이할 때 역시 동개만을 차고서 길 옆에서 절을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나라의 풍속이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선조(先朝) 이전은 오히려 논하지 않더라도 병신년 이후부터 말해 볼 때, 고 상신 김치인(金致仁)과 정존겸(鄭存謙)이 대신으로 있을 때는 장수인 신하들도 감히 병을 핑계대지 못하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훈련원의 장수들이 매번 병을 핑계대니 어찌 몹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정조 22년 11월 23일(임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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