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법성창

영광 법성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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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조창(漕倉). ‘법성창(法聖倉)’으로도 불리었다. 처음에 전라도에는 덕성창(德城倉)과 영산창(榮山倉)만이 설치되었으나, 세조 때 법성포에 조창을 마련하여 3개 조창에서 전라도지방의 세곡을 나누어 조운하게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법성포창에서는 39척의 조선(漕船)을 비치하고 영광·흥덕·옥과·부안·함평·진원·담양·무장·장성·정읍·곡성·창평·고부·순창·고창 등 15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3월 15일 이전에 출발하여 4월 10일 안에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상납하였다. 그 운송항로는 전라도·충청도 연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안흥량(安興梁)을 지나, 경기도 연해안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것이다. 그 뒤 수로가 험하다는 이유로 1512년(중종 7) 나주의 영산창이 혁파되고 덕성창의 후신으로 군산창이 신설되자 흥덕·부안·고부·정읍 등 여러 고을의 세곡을 군산창에 이납하게 하는 대신 영산창에서 이관한 5개 고을을 포함하여 관리하였다. 그러나 세곡의 임운(賃運)이 활발하게 되면서 조창의 기능은 약화되어 17세기 이후로는 영광·광주·담양·순창·옥과·고창·화순·곡성·동복·정읍·창평·장성 등 12W 고을과 법성진(法聖鎭)의 세곡만을 조운하였다. 조창에는 일정량의 조선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1척의 적재량이 800석에서 1,000석에 이르는 조선 29척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납과 운송을 위하여 처음에는 해운판관(海運判官)이 임명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법성첨사(法聖僉使)가 주관하였고 조군(漕軍) 1,344명이 소속되었다.

사진

영광 법성포항

영광 법성포항 좁은 만구(灣口)에 뻗은 작은 반도의 남안에 자리잡아 북서계절풍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좋은 항구이다. 고려 성종(成宗) 때 이곳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여, 영광 ·흥덕(興德) 등 12개 군의 세곡(稅穀)을 받아 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조창제도는 계속 실시되었으나 법성포는 항구로서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조창제도의 폐지와 함께 쇠퇴하여 오늘날 ‘영광굴비’의 어항으로 한 중심지를 이룬다.

영광 법성포항

영광 법성포항 좁은 만구(灣口)에 뻗은 작은 반도의 남안에 자리잡아 북서계절풍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좋은 항구이다. 고려 성종(成宗) 때 이곳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여, 영광 ·흥덕(興德) 등 12개 군의 세곡(稅穀)을 받아 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조창제도는 계속 실시되었으나 법성포는 항구로서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조창제도의 폐지와 함께 쇠퇴하여 오늘날 ‘영광굴비’의 어항으로 한 중심지를 이룬다.

영광 법성포구

영광 법성포구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법성포리에 있는 포구(浦口)이다. 군의 북부 해안가에 위치하여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514년(중종 9)에 법성포에 진(鎭)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가, 1708년(숙종 34)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1명 배치하고 관할하도록 하였다. 1514년에 진성(鎭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1,688척(尺)이었다. 법성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수군통제부를 설치하는 등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영광 법성포 그물손질

영광 법성포 그물손질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영광 법성포 굴비

영광 법성포 굴비 영광 법성포 굴비의 모습이다.

영광 법성포 굴비

영광 법성포 굴비 영광 법성포 굴비의 모습이다.

영광 법성포 계마항 입구

영광 법성포 계마항 입구 계마항 입구이다.

영광 법성포 계마항 석양

영광 법성포 계마항 석양 계마항에서 바라본 석양모습이다.

영광 법성포 계마항 등표

영광 법성포 계마항 등표 계마항 등표모습이다.

영광 법성포 계마항 등표

영광 법성포 계마항 등표 계마항 등표모습이다.

영광 법성포 계마항 등표

영광 법성포 계마항 등표 계마항 등표모습이다.

영광 법성포 갑문

영광 법성포 갑문 법성포의 갑문이다.

영광 법성포 갑문

영광 법성포 갑문 법성포의 갑문이다.

영광 법성포

영광 법성포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법성포리에 있는 포구(浦口)이다. 군의 북부 해안가에 위치하여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514년(중종 9)에 법성포에 진(鎭)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가, 1708년(숙종 34)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1명 배치하고 관할하도록 하였다. 1514년에 진성(鎭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1,688척(尺)이었다. 법성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수군통제부를 설치하는 등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영광 법성포

영광 법성포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법성포리에 있는 포구(浦口)이다. 군의 북부 해안가에 위치하여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514년(중종 9)에 법성포에 진(鎭)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가, 1708년(숙종 34)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1명 배치하고 관할하도록 하였다. 1514년에 진성(鎭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1,688척(尺)이었다. 법성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수군통제부를 설치하는 등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영광 백제불교도래지에서 본 법성포

영광 백제불교도래지에서 본 법성포 백제 불교 도래지에서 본 법성포의 모습이다. 군의 북부 해안가에 위치하여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514년(중종 9)에 법성포에 진(鎭)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가, 1708년(숙종 34)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1명 배치하고 관할하도록 하였다. 1514년에 진성(鎭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1,688척(尺)이었다. 법성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수군통제부를 설치하는 등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였다.

서해쪽에서 본 법성포

서해쪽에서 본 법성포 전남 영광군 법성면 해안에 있는 포구(浦口)이다. 좁은 만구(灣口)에 뻗은 작은 반도의 남안에 자리잡아 북서계절풍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좋은 항구이다. 고려 성종(成宗) 때 이곳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여, 영광 ·흥덕(興德) 등 12개 군의 세곡(稅穀)을 받아 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조창제도는 계속 실시되었으나 법성포는 항구로서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조창제도의 폐지와 함께 쇠퇴하여 오늘날 ‘영광굴비’의 어항으로 한 중심지를 이룬다.

서해쪽에서 본 법성포

서해쪽에서 본 법성포 전남 영광군 법성면 해안에 있는 포구(浦口)이다. 좁은 만구(灣口)에 뻗은 작은 반도의 남안에 자리잡아 북서계절풍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좋은 항구이다. 고려 성종(成宗) 때 이곳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여, 영광 ·흥덕(興德) 등 12개 군의 세곡(稅穀)을 받아 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조창제도는 계속 실시되었으나 법성포는 항구로서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조창제도의 폐지와 함께 쇠퇴하여 오늘날 ‘영광굴비’의 어항으로 한 중심지를 이룬다.

반대편에서 본 법성포

반대편에서 본 법성포 전남 영광군 법성면 해안에 있는 포구(浦口)이다. 좁은 만구(灣口)에 뻗은 작은 반도의 남안에 자리잡아 북서계절풍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좋은 항구이다. 고려 성종(成宗) 때 이곳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여, 영광 ·흥덕(興德) 등 12개 군의 세곡(稅穀)을 받아 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조창제도는 계속 실시되었으나 법성포는 항구로서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선박의 출입이 불편하여 조창제도의 폐지와 함께 쇠퇴하여 오늘날 ‘영광굴비’의 어항으로 한 중심지를 이룬다.

간척되고 있는 법성포

간척되고 있는 법성포 전라남도 영광군 북서 해안에 있는 법성포의 모습이다. 조기가 많이 나며 만내의 개펄은 간척하여 논과 염전으로 쓰고 있다.

그래픽

동해안 해운로

동해안 해운로 동해안 해운로는 우리나라 동해 최북단인 함경북도 나진시에서 부터 시작하여 각각의 주여 거점을 거쳐 부산 광역시 부산포에까지 이른다.

남해안 해운로 통합

남해안 해운로 통합 남해안 해운로는 부산광역시 부산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주요 거점을 거쳐 전라남도 해남 우수영에 이른다

서해안 해운로

서해안 해운로 서해안 해운로는 전라남도 해남 우숭에서 시작하여 서해안 주요 거점을 거쳐 강화, 인천사이를 통과하고 이를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에까지 이른다.

강을 건너는 나루터

강을 건너는 나루터 세곡미를 저장하기 위해 강변에 축조한 창고와 나루터에 정박한 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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