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 9년, 임신년(壬申年), 1872년
1월 5일
• 이남식(李南軾)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월 6일
• 김익문(金益文)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월 25일
• 창의문 밖 선혜청 평창(平倉)을 폐지하고 소속 9읍의 미곡을 경창(京倉)에 수납하도록 함.
1월 30일
• 한성의 각사와 각영에서 1871년의 회계장부를 올림.
2월 4일
• 경무대에서 알성문과(謁聖文科) 시험을 실시하여 문과 5명, 무과에서 장지용(張志庸) 등 163명을 뽑음.
2월 14일
• 김원식(金元植)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3월 5일
• 만월대(滿月臺)에서 정시(庭試) 문 · 무과 시험을 시행하여 문과 5명, 무과 26명을 뽑음.
3월 13일
• 한성 부근에 기근 구제소를 설치함.
4월 9일
• 경무대에서 경과정시(慶科庭試)를 시행하여 문과 9명, 무과 433명을 뽑음.
4월 28일
• 김병운(金炳雲)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9일
• 이경하(李景夏)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14일
• 경기전(慶基殿)을 보수함.
6월 7일
• 선혜청의 경비 3만 냥을 들여 군기제조역소(軍器製造役所)를 준공함.
8월 3일
• 임금 행차시 각 군영과 관청에서 담당하여 처리하도록 함.
9월 5일
• 홍종운(洪鍾雲)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9월 16일
• 경복궁 중건이 완성되어 영건도감(營建都監)이 폐지됨.
• 경복궁 중건 영건도감에서 최종 소요경비를 올림. 총 건축비 772만 8,694냥, 단목(丹木) 5천근, 백미 824석, 백반(白礬) 3천근.
11월 29일
•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함.
12월 24일
• 근정전에서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에게 존호(尊號)와 전문(箋文)을 올리고, 고종과 왕비도 존호를 받음.
12월 30일
• 한성부에서 1872년 전국과 오부의 호구 수를 보고함. 한성부 인구 20만 819명(남자 9만 8,764명, 여자 10만 2,055명), 호수 4만 6,5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