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 19년, 임오년(壬午年), 1882년

조선 고종 19년, 임오년(壬午年), 1882년

1월 15일

• 한성의 각사와 각영에서 겨울철 3개월간의 회계장부를 올림.

2월 19일

• 인정전에서 왕세자빈의 책빈례(冊嬪禮)를 행함.

2월 22일

• 세자빈궁에서 사용할 크고 작은 인장을 새로 만듦.

3월 3일

• 호조에서 거두어 들이던 삼수미와 돈 · 베 · 무명 등을 훈련도감의 창고에 보관하여 군사들의 생활에 필요한 수용으로 하도록 함.

• 이휘중(李彙重)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3월 11일

• 성이호(成彛鎬)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3월 16일

• 조경호(趙慶鎬)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3월 22일

• 함녕전 상량문의 제술관을 삼음.

• 춘당대(春塘臺)에서 경과(慶科)를 시행하여 문과 15명, 무과에서 이민한(李敏漢) 등을 뽑음.

3월 23일

• 박제관(朴齊寬)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6일

• 춘당대(春塘臺)에서 경과정시(慶科庭試)를 행하여 문과 5명, 무과에서 김두식(金斗植) 등을 뽑음.

• 이 조인됨.

4월 7일

• 홍종헌(洪鍾軒)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17일

• 이돈응(李敦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19일

• 삼각산 · 목멱산 · 한강에서 기우제를 지냄.

4월 21일

• 주전소(鑄錢所)에서 이미 주조한 ‘이자하천자(利字下天字)’의 새 돈과, 지금 쓰고 있는 돈 이름을 ‘이자하지자(利字下地字)’로 고쳐 계속 만들 것을 보고함.

• 이 조인됨.

4월 22일

•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2차 기우제를 지냄.

4월 23일

• 윤종의(尹宗儀)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25일

• 남단과 우사단에서 3차 기우제를 지냄.

4월 27일

• 민영목(閔泳穆)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28일

• 사직단과 북쪽 교외에서 4차 기우제를 지냄.

5월 1일

• 종묘에서 5차 기우제를 지냄.

5월 3일

• 이돈상(李敦相)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4일

• 충청도 유생 백낙관(白樂寬)이 남산에서 거화(擧火)하여 원정(原情)하였는데, 척사척외(斥邪斥外)를 논함.

• 삼각산 · 목멱산에서 제6차 기우제를 지냄.

5월 7일

•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제7차 기우제를 지냄.

5월 10일

• 남단과 우사단에서 제8차 기우제를 지냄.

5월 13일

• 북쪽 교외에서 9차 기우제를 지냄.

5월 15일

• 을 조인함.

5월 18일

• 사직단에서 특별 기우제를 지냄.

5월 21일

• 종묘에서 특별 기우제를 지냄.

5월 24일

• 남단에서 특별 기우제를 지냄.

5월 27일

• 북쪽 교외에서 특별 기우제를 지냄.

6월 1일

• 선농단(先農壇)에서 특별 기우제를 지냄.

6월 4일

• 우사단에서 특별 기우제를 지냄.

6월 5일

• 훈련도감 군인들이 도봉소(都捧所)에서 밀린 요미(料米)를 지급받을 때, 겨와 모래가 섞여 있는 것에 항의하여 창고지기를 구타함.(임오군란의 원인이 된 도봉소사건)

• 사직단에서 특별 기우제를 지냄.

6월 9일

• 김장손(金長孫) · 유춘만(柳春萬) 등이 민겸호(閔謙鎬)의 집을 파괴하고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공사관을 불지르고 도주함.(임오군란)

• 함녕전(含寧殿) 공사를 중지함.

• 주교사(舟橋司)에서 받던 각종 공물을 각 군영, 각 관청, 각 궁방에서 받아들이도록 함.

6월 10일

• 군사들이 창덕궁에 돌입하여 왕비를 처단하려 하였으며, 민겸호 · 김보현(金輔鉉)을 살해함.

•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과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御營)을 폐지하고 삼군부(三軍府)와 오군영(五軍營)을 다시 부활시킴.

• 왕비는 장호원으로 피난하고, 정부는 왕비의 국상을 발표함.

6월 12일

• 11일 밤 장사치들이 흥인문 밖에서 한성으로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퍼져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남산(南山)과 북악(北岳)으로 올라가 산이 새하얗게 뒤덮임.

6월 13일

• 민영위(閔泳緯)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6월 19일

• 이재봉(李載鳳)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6월 22일

• 돈을 새로이 주조하는 일을 철폐함.

7월 1일

• 대군주(大君主), 대조선대군주(大朝鮮大君主), 대조선국대군주(大朝鮮國大君主)의 인장을 만듦.

7월 3일

• 임오군란 때 도피했던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호위병을 인솔하고 한성으로 들어와 남부 이현(泥峴)의 금위대장 이종승(李鍾承)의 집에 머묾.

7월 4일

• 심이택(沈履澤)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7월 7일

• 일본의 다까시마(高島) 소장(少將)이 인솔하는 일본 육군과 해군 1,050명이 한성에 들어옴.

• 임금이 편전에서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를 접견함.

7월 10일

• 청나라의 도원(道員) 마건충(馬建忠)이 한성의 남별궁(南別宮)에 머묾.

7월 12일

• 군대를 앞세운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창덕궁에서 고종을 알현하고 7개의 요구조건을 제시함.

• 청나라가 임오군란 발생을 이유로 오장경(吳長慶)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사 700명과 함께 동별영(東別營)에 들어옴.

7월 13일

• 낮 12시 청나라의 정여창(丁汝昌)과 마건충(馬建忠)이 운현궁(雲峴宮)에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만남. 저녁에 답례차 청나라 오장경(吳長慶)의 숙소를 방문한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납치함.

7월 17일

• <제물포조약>과 <조일수호조규속약> 체결로 도성 내에 일본 공사관을 설치하고, 그 가족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함.

8월 1일

• 임오군란으로 장호원에 피신해 있던 왕비가 환궁함.

• 육상궁(毓祥宮)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소실됨.

8월 4일

• 성이호(成彛鎬)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7일

• 왕비의 환궁을 축하하는 하례(賀禮)를 인정전에서 행하고 사면령을 내림.

8월 8일

• 박영효(朴泳孝)를 대표로 하여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함.

8월 10일

• 별초군(別抄軍)과 교련소(敎鍊所)의 군사를 총융청에 소속시킴.

8월 15일

• 한성에 있는 척화비(斥和碑)를 보신각(普信閣)부근에 매장함.

8월 23일

• 을 체결함.

8월 24일

• 임오군란의 주모자들을 처형함.

8월 26일

• 박제관(朴齊寬)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9월 1일

• 정기세(鄭基世)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 호조의 제의를 받아들여 선혜청 별창에 주전소를 설치함.

9월 2일

• 정주응(鄭周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9월 3일

• 경저리(京邸吏)의 방채(放債) 폐단을 금지함.

9월 7일

• 남정순(南廷順)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9월 13일

• 주전소에서 무자전(武字錢)을 주조함.

9월 22일

• 정범조(鄭範朝)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9월 26일

• 원납전제(願納錢制)를 폐지함.

9월 29일

• 남정순(南廷順)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2일

• 훈련도감을 폐지하고 왕궁 숙위를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에서 분장하도록 함.

10월 7일

• 은화(銀貨)를 주조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와 함께 쓰도록 함.

10월 12일

• 경기 일대의 흉년으로 한성의 쌀값이 폭등함.

10월 14일

• 민영목(閔泳穆)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19일

• 증광문과(增廣文科) 복시(覆試)를 시행하여 33명을 뽑음.

10월 20일

• 춘당대(春塘臺)에서 문 · 무과(文武科) 전시(殿試)를 시행하여 문과 61명, 무과 384명 뽑음.

11월 1일

• 춘당대(春塘臺)에서 성균관 유생들의 응제시(應製試)를 시행하여 변상훈(邊相勳) 등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 하도록 함.

11월 7일

• 남정순(南廷順)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새로 만든 친군(親軍)의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원세개(袁世凱) 장광전(張光前) 등 청나라 장수들을 치하함.

11월 12일

• 선혜청의 화재로 건물 111칸을 태우고 보관 중이던 무명 148동 36필, 돈 3,336냥, 은 147냥이 모두 소실됨.

• 이돈응(李敦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1월 17일

• 임금이 청나라 사신 마건상(馬建常)과 전 청나라 주재 독일영사관인 목린덕(穆麟德, 묄렌도르프)을 접견함.

• 통리아문(統理衙門)을 새로이 설치하고 외무업무를 관장하도록 함.

11월 18일

•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을 설치하도록 하고, 의정부로 하여금 아문 설치할 제도를 마련하도록 함.

11월 29일

• 신설된 통리내무아문이 내병조(內兵曹)의 청사로, 내병조는 호위청(扈衛廳) 자리로, 호위청은 요금문(曜金門) 안의 공해(公廨)로 옮기도록 함.

12월 4일

•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칭하고 독판(督辦) · 협판(協辦) · 참의(參議)의 직제를 확립함.

12월 12일

• 춘당대(春塘臺)에서 문 · 무과 별시(別試)를 시행하여 문과 10명, 무과 58명을 뽑음.

12월 22일

• 삼군부와 기무처를 모두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합치도록 함.

12월 28일

• 양반의 상업종사와 상민(常民)의 성균관 · 사학 · 향교 등의 입학을 허락함.

12월 29일

• 박영효(朴泳孝)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 감생청(減省廳)에서 감생별단(減省別單)을 올림. 이 때 사도시(司imagefont寺) · 내섬시(內贍寺) · 내자시(內資寺) · 사재감(司宰監) · 의영고(義盈庫) · 장원서(掌苑署) · 사포서(司圃署) · 와서(瓦署) · 조지서(造紙署) · 혜민서(惠民署) · 활인서(活人署) · 주교사(舟橋司) · 내궁방(內宮房) 등의 관청을 폐지함.

12월 30일

• 한성부에서 1882년 전국과 한성 오부의 호구수를 보고함. 한성부 인구 19만 6,464명(남자 9만 6,472명, 여자 9만 9,992명), 호수 4만 4,4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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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丙午年), 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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