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 7년, 경오년(庚午年), 1870년
1월 2일
• 임금이 근정전에서 종묘와 영녕전(永寧殿) 제례를 위한 향과 축문을 전달하고 종묘와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함.
• 성균관에 예속된 자 중 군적에 포함된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과 베를 주도록 함.
1월 12일
• 종묘와 영녕전에 있는 신위를 창덕궁으로 옮겨 봉안하고 확장 개수공사를 착공함.
1월 15일
• 한성의 각사와 각영에서 1869년 회계장부를 올림.
1월 17일
• 심승택(沈承澤)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7일
• 남성원(南性元)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10일
• 서원순(徐元淳)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14일
• 김수현(金壽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27일
• 종묘와 각릉 공사의 재정이 바닥나자 선혜청에서 돈 10만 냥을 가져다 쓰도록 함.
3월 1일
• 한성 하천의 준천과 석축공사를 실시함.
3월 6일
• 종묘와 영녕전의 본전(本殿) 4칸, 서쪽에 있는 협실(夾室) 6칸, 동쪽의 협실 5칸의 개수공사가 완료되어 신위를 다시 옮겨 봉안함.
3월 25일
• 김대근(金大根)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3월 29일
• 임금이 신주를 옮겨 모신 종묘와 영녕전에 전배(展拜)함.
4월 7일
• 이동현(李東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27일
• 호조와 선혜청의 창고가 부족하여 승정원 행랑채에 저장소를 마련함.
4월 28일
• 경무대(景武臺)에서 식년 문 · 무과를 시행하여 문과 33명, 무과 28명을 뽑음.
4월 29일
• 이승보(李承輔)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13일
• 삼각산 · 목멱산 · 한강에서 기우제를 지냄.
7월 7일
• 성균관에서 칠석제(七夕製)를 시행하여 장원한 자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 하도록 함.
8월 25일
• 임금이 힘 있는 자가 산록을 광점(廣占)하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고, 《대전회통(大典會通)》을 개정할 때 보수(步數)를 정하여 초과하지 못하도록 함.
9월 5일
• 《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하여 선정전을 수리할 때는 궁궐의 문에 큰 종을 달도록 함.
9월 6일
• 임금이 건원릉(健元陵) · 수릉(綏陵) · 경릉(景陵)에 친히 제사함.
9월 25일
• 유장환(兪章煥)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1월 17일
• 한성 부근에 살고 있는 빈민들을 구제함.
• 조기응(趙基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2월 10일
• 세자와 세존의 묘호를 원(園)으로 승격함.
• 효창묘(孝昌墓) 외의 원(園) 이름을 개칭함.
12월 13일
• 순창(順昌) · 소경(昭慶) · 의령(懿寧) · 효창(孝昌) 등 원을 지키는 관명을 고쳐 수위관(守衛官)외에 수봉관(守奉官)을 새로 둠.
12월 29일
• 한성부에서 1870년 전국과 한성 오부의 호구 수를 보고함. 한성부 인구 20만 7,062명(남자 10만 2,302명, 여자 10만 4,760명), 호수 4만 5,928호.
이해
• 선희궁(宣禧宮)을 폐지하고 육상궁(毓祥宮)과 합함.
• 연호궁(延祜宮)을 육상궁 안으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