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 11년, 갑술년(甲戌年), 1874년
1월 4일
• 경비문제로 인해 경복궁 안의 기와 덮는 공사를 중지함.
1월 6일
• 청전(淸錢)의 통용을 금하고, 상평전(常平錢) 사용을 장려함.
1월 15일
• 임상준(任商準)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월 23일
• 《일성록(日省錄)》을 수정 보완함.
1월 29일
• 한성의 물가가 폭등하여 각도의 매점을 엄금함.
1월 30일
• 한성의 각사와 각영에서 1873년 겨울 3개월간의 회계장부를 올림.
2월 5일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수하도록 함.
2월 8일
• 중전이 원자를 출산함.
2월 14일
• 원자(元子)의 탄생을 축하하여 돈화문 밖에 끼니를 거르는 공시인(貢市人)들을 모아 쌀을 지급함.
2월 16일
• 임금이 근일 유생들의 상소가 의리를 빙자하고 내실이 협잡(挾雜)하니, 유생의 상소는 반장(泮長)의 허락을 받은 후에 입품(入稟)하도록 함.
2월 17일
• 오취선(吳取善)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22일
• 김제에 사는 조환용(趙煥容)이 돈화문으로 들어와 숙장문(肅章門)의 북을 침.
3월 5일
• 한성 지역의 소나무 벌목을 금하고, 나무심기를 장려함.
3월 7일
• 창덕궁을 수리함.
3월 9일
• 한성부 오부의 식년(式年) 호적을 낭청(郎廳)으로 하여금 강화도로 옮기도록 함.
4월 1일
• 윤육(尹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15일
• 한성의 각사와 각영에서 봄철 3개월간의 회계장부를 올림.
4월 20일
• 성균관의 유생이 과거시험의 부정을 이유로 권당(捲堂)함.
4월 29일
• 각 지방에 문서를 보내 경복궁 중건에 쓸 재목을 공급하도록 함.
• 오취선(吳取善)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5월 15일
• 증광 문 · 무과를 실시하여 문과 43명, 무과 28명을 뽑음.
6월 20일
• 무위소(武衛所)를 창설하고 지휘관을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로 함.
7월 2일
• 김익진(金翊鎭)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7월 18일
• 창의문 밖에 선혜청의 평창을 다시 설치하고 경기도 아홉 개 고을에서 바치는 대동미를 보관하도록 함.
7월 24일
• 한성의 각사와 각영에서 여름철 3개월간의 회계장부를 올림.
7월 27일
• 만동묘(萬東廟)를 중건하는 일을 완성했으므로 충청감사 등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림.
9월 4일
• 정건조(鄭健朝)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15일
• 한성의 각사와 각영에서 가을철 3개월간의 회계장부를 올림.
11월 1일
• 호조에서 전각을 보수하고 무위소(武衛所)를 창설하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 많아 국고가 궁핍하다고 아룀.
11월 25일
• 서상정(徐相鼎)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2월 25일
• 홍원섭(洪遠燮)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2월 29일
• 한성부에서 1874년 전국과 오부의 호구 수를 보고함. 한성부 인구 19만 1,445명(남자 9만 4,016명, 여자 9만 7,429명), 호수 4만 5,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