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융희 원년, 정미년(丁未年), 1907년

대한제국 융희 원년, 정미년(丁未年), 1907년

1월 16일

•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우스>에서 고종이 <한일협약>에 인허(認許) 또는 친서(親署)하지 않았다고 보도함. 이에 통감부에서 정부로 하여금 그 보도를 정정(訂正)하고 《관보(官報)》에도 고시하도록 함.

1월 24일

• 고종, 중화전(中和殿)에서 황태자비책비례(皇太子妃冊妃禮)를 거행함.

1월 25일

• 통감부, 남산 왜성대(倭城臺)의 신축 청사로 옮김.

1월 31일

• 한성부윤 박의병(朴義秉)을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임명함.

이달

• 중서(中署) 서린방(瑞麟坊) 전옥계(典獄契)에 한성상업회의소 건축 및 부속상품 진열관을 준공함.

2월 1일

• 내전(內殿)에서 황태자비관례(皇太子妃冠禮)를 거행함.

2월 22일

• 기업합자회사(起業合資會社, 남대문 부근) 자본금 100만 원을 증자(增資)하고 주식회사로 조직하기로 함.

3월 4일

• 의병장 노응규(盧應奎)가 경무청감옥(京務聽監獄)에서 사망함.

• 지진이 발생함.

3월 11일

• 한성부판윤에 박의병(朴義秉)을 임명함.

3월 25일

• 중추원(中樞院)을 통감부 법무원(法務院)으로 옮김.

이달

• 마포에 연와제작소(煉瓦製作所)를 설립함.

• 한국주차일본군사령부, 용산 · 평양 · 의주에 있는 군용지 내 가옥과 분묘를 철거하도록 강요함.

• 일본군이 마차에 대포를 싣고 길거리를 왕래하면서 시민들을 위협 시위함.

4월 18일

• 일본군이 동대문 밖 둔지미 등지를 군용지로 점령하고 분묘를 옮길 것을 강요함.

4월 20일

• 전 평리원(平理院) 검사 이준(李儁)이 고종의 밀사(密使)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을 출발함.

이달

• 의정부(議政府) 청사 착공.

• 남대문 좌우측 성벽 철거, 도로 개설.

• 용산에 군사시설로 사격장을 설치함.

6월 14일

• 의정부(議政府)를 내각(內閣)으로, 수상(首相)을 내각총리대신으로 개칭함.

6월 30일

• 한성의 신사(紳士)들이 장동(壯洞) 농상소(農商所)에서 박영효(朴泳孝) 귀국 환영회를 개최함. 이때 인명의숙(仁明義塾) 경영자인 정재홍(鄭在洪)이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살 계획을 세웠으나 이토오가 나타나지 않자 분개하여 권총으로 자살함.

7월 1일

• 제1회 변호사시험을 실시하여 이항종(李恒鍾) · 허헌(許憲) 등 6명을 선발함.

7월 14일

• 고종의 밀사(密使) 이준(李儁)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사망함.

7월 16일

• 오후 2시에 이완용(李完用) 등이 내각회의를 열고 고종의 양위(讓位)를 결행하기로 결정함. 오후 8시에 이완용이 고종에게 헤이그밀사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황제에게 사과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함. 이에 이완용이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고종이 또한 거부함.

7월 17일

• 밤에 대신 일동이 고종에게 양위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격분하므로 물러남.

7월 18일

• 밤 8시경부터 이완용 등이 다시 고종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하자 고종이 완강하게 거부함과 동시에 대신들에게 일본의 요구를 끝까지 방어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함. 밤 11시에 고종이 신기선(申箕善) · 민영휘(閔泳徽) · 민영소(閔泳韶) 등 원로대신의 의견을 묻자, 양위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아룀.

• 고종, 조칙(詔勅)을 내려 황태자로 하여금 정사(政事)를 대리하도록 함.

• 밤 9시경부터 동우회(同友會) 회원 1천여 명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종로와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고종 양위(讓位) 반대를 절규함. 이때 궁궐을 수비하던 일본경찰과 군중간에 충돌이 일어남. 밤 11시에는 시민 수만 명이 결사대를 조직함. 19일 새벽에야 일본 순사와 헌병이 총검으로 구타하여 해산하게 됨.

7월 19일

• 고종, 장례원경(掌禮院卿) 박용대(朴容大)가 황태자 대리일(代理日)을 결정할 것을 청함에 당일로 거행하게 함.

• 오전 10시에 황태자 대리섭정(代理聽政)에 대한 하례를 거행함.

• 황태자 대리섭정의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격분하여 아침부터 종로 등 각처에 모여 통곡하며, 내각대신들을 성토하고, 표훈원(表勳院)으로 몰려가 투석(投石)하는 등 항의운동을 일으킴. 종로에서는 군중과 경찰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함. 밤 11시경에는 일진회(一進會)의 기관지 발간처인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습격함.

7월 20일

• 오전 8시에 황태자 대리섭정식(代理攝政式)을 거행함.

• 시민 수만 명이 석고단(石鼓壇)에서 결사회(決死會)를 조직, 이완용(李完用)의 집을 불태울 것과 고종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남대문역 · 서대문역을 불태우고 철도를 파괴할 것을 결의함. 이어 서소문 밖 약현(藥峴)에 있는 이완용 집을 불태우고, 인근의 순사파출소를 파괴하였으며, 시위대 병졸들이 종로순사파출소에 사격을 가함.

• 일본천황, 의도적으로 한국에서의 황태자 대리(代理)를 양위(讓位)로 해석하여 ‘황태자의 황제즉위를 축하’하는 내용의 전보를 한국에 보내옴.

7월 21일

• 고종, 밤에 황태자에게 다시 전위(傳位)함.

• 황태자,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올리는 조칙을 발포함.

• 고종 양위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일본 순사와 헌병이 서울 시내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순찰과 경계를 엄중히 함. 밤에 격분한 민중들이 동소문 밖에 있는 이지용(李址鎔) · 이근택(李根澤) · 이근호(李根澔)의 별장과 이지용의 용산강정(龍山江亭)을 불태움.

7월 22일

• 순종,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등이 조서(詔書)나 칙서(勅書) 등에 ‘대리(代理)라는 칭호 대신에 황제(皇帝)로 칭할 것’을 청하므로 허락함.

• 내외국인이 서로 살상(殺傷)하고, 사람들이 대신들에게 투석하며, 가옥에 방화하는 일이 매일 발생하는 데에 대한 책임으로 한성부판윤 박의병(朴義秉)을 해임함.

• 한성부판윤에 장헌식(張憲植)을 임명함.

7월 24일

• 일명 체결.

7월 25일

• 군대해산 조칙을 내림.

7월 27일

• 경무청(警務廳)을 경시청(警視廳)으로 개칭함.

7월 30일

• 경시청(警視廳), 황태자 대리에 대한 시민 시위와 이완용(李完用) 집 방화를 주도한 동우회(同友會) 회원 30명을 체포함.

이달

•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요청한 일본 보병 제12여단이 서울에 도착함.

8월 1일

• 훈련원(訓鍊院)에서 군대해산식이 강행됨. 이에 서소문의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분격하여 권총으로 자결하자 같은 대대의 군사들과 제2연대 제1 · 2대대 군사들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여 한국군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함.

8월 2일

• 대한제국의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바꾸는 개원식(改元式)을 거행함.

8월 7일

• 순종, 영왕(英王) 은(垠)을 봉(封)하여 황태자로 삼음.

8월 13일

• 한성재판소 수반판사(首班判事)에 이시영(李始榮)을 임명함.

• 경기도 강화 의병대장 이동기(李東基)가 한성에서 체포됨.

8월 14일

• 순종,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므로 수리하도록 함.

8월 23일

• 박영효(朴泳孝), 황태자대리 하례 때 불참한 이유로 태형 80대를 맞고 석방되어 귀가하자마자 다시 연행됨.

8월 27일

• 경운궁(慶運宮) 돈덕전(惇德殿)에서 순종 즉위식을 거행함. 이때 관료들이 모두 단발(斷髮) 차림을 함.

9월 7일

• 영왕(英王) 은(垠)의 황태자 책봉례(冊封禮)를 거행함.

9월 15일

• 니현(泥峴)에서 한일박람회 개회식을 거행함.

• 일본인 용산거류민단(龍山居留民團) 설치.

9월 17일

• 순종, 덕수궁 수옥헌(漱玉軒)에서 즉조당(卽祚堂)으로 처소를 옮김.

9월 24일

• 일본군이 석교(石橋) 부근에서 의병 100여 명을 공격하고, 민가를 불태움.

10월 7일

• 순종,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므로 수리하도록 함.

10월 16일

• 10월 20일까지 일본 황태자가 서울에 머묾.

10월 20일

• 순종, 남대문정거장에서 환국하는 일본 황태자를 송별함.

이달

• 인천세관 소관 마포세관감시서(麻浦稅關監視署)를 개서(開書)함.

• 도로 건설을 위하여 남대문 부근의 남지(南池)가 매몰됨.

11월 13일

• 순종, 황태자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김.

11월 14일

• 순종, 안국동에 덕수궁을 건축하게 함.

11월 27일

• 홍문관(弘文館)을 폐지하고, 봉상시(奉常寺) · 종부시(宗簿寺) 업무와 함께 규장각으로 통합함.

이달

• 제일은행 한성지점 착공.

12월 13일

• 한성부 직제를 개정함. 부윤 1명(칙임), 사무관 2명(주임), 주사 7명(판임), 기수(技手) 5명을 둠.

12월 23일

• 한성재판소를 한성지방재판소로 개칭함.

12월 26일

• 이인영(李麟榮)의 항일의병 4천여 명이 한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물러남.

12월 27일

• 한성부에 감옥서를 설치하여 경성감옥서(京城監獄署)라고 칭하는 건을 반포함.

이달

• 의정부(議政府) 청사 준공.

이해

• 한국은행권 제조를 위해 용산전환국(龍山典圜局) 인쇄국 공장 증축을 시작함.

• 남부경찰서를 설치함.

• 경성이사청경찰서를 설치함. 1924년에 경성본정경찰서로 개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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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丙午年), 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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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년(丙辰年), 1916년
신유년(辛酉年), 1921년
병인년(丙寅年), 1926년
신미년(辛未年), 1931년
병자년(丙子年), 1936년
신사년(辛巳年), 1941년
병술년(丙戌年), 194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