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己未年), 1919년

기미년(己未年), 1919년

1월 21일

• 고종,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함.

2월 13일

• 경성종로금융조합 창립.

2월 25일

• 용산 스탠다드무역회사의 연초공장 직공 600명이 파업함.

2월 27일

• 수송동 41번지 보성사(普成社)에서 약 2만 1천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함.

2월 28일

• 민족대표 33인 중 20여 명이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 집에 모여 3 · 1운동계획을 최종적으로 검토함.

3월 1일

• 새벽에 동대문과 남대문 등 서울의 큰 거리에 각종 격문이 붙고, 독립운동의 정확한 소식을 알리기 위한 <조선독립신문> 제1호가 독립선언서와 함께 민중에 배포됨.

• 민족대표 33인 중 29명, 정오부터 명월관(明月館) 지점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오후 2시 를 낭독함.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과 시위가 벌어진 후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서영환(徐永煥)을 통하여 조선총독에게 독립선언을 통고하였으며, 이어 몰려온 일본경찰에 체포됨.

• 오후 2시에 탑골공원 팔각정 단상에 태극기가 걸림. 군중 4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경신학교(儆信學校) 졸업생 정재용(鄭在鎔)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함. 이어 군중들이 종로거리로 나가 시위 군중과 합류하여 시가행진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계속 확산됨. 시위 중 일본 군경(軍警)이 발포(發砲)와 만행을 자행함.

• 오후 8시경에 마포 전차종점 부근에서 시민 · 학생 등 1천여 명이 시위함.

• 시위 관련 주도자 134명이 체포됨.

3월 2일

• 새벽 0시 20분경에 400여 명이 종로네거리로부터 종로경찰서 앞으로 시위 행진함. 20여 명이 체포됨.

3월 3일

• 훈련원(訓鍊院)에서 고종의 국장(國葬)을 거행함.

• 밤에 신정(新町, 묵정동) 쪽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남. 시위 군중 속에는 서양인 4~5명이 포함됨.

3월 5일

• 대한문(大漢門) 앞, 종로경찰서 앞, 남대문역~남대문 지역에서 독립운동 시위가 일어남.

3월 7일

• 동아연초공장(東亞烟草工場) 노동자 500여 명이 파업함.

3월 9일

• 서울 상인들, 동맹 철시(撤市)에 들어감. 4월 초까지 계속됨.

• 3 · 1독립운동 이후 경성의 한성은행을 친일이라 하여 사람들의 다액 환불 요구가 증가했는데 3월 9일부터 이틀간의 환불금액이 총 45만 원에 달함.

3월 14일

• 영등포금융조합 설립.

3월 20일

• 3 · 1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서대문감옥에 구치되었던 101명(남 95, 여 6) 석방.

3월 22일

• 시민들이 봉래동 철도 교차점 부근에서 출발하여 의주로~독립문까지 독립만세 시위 행진함.

3월 23일

• 훈련원(訓鍊院) 부근, 동소문 안, 도원동, 원효로, 창덕궁 앞에서 50~5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함.

3월 26일

• 시위 군중이 와룡동파출소 · 재동파출소에 연행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투석(投石) 등으로 저항하자 일본군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함.

• 마포 · 한강 · 북악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남.

3월 27일

• 만철경성관리국(滿鐵京城管理局) 직공 800여 명이 원효로 일대에서 시위함.

이달

• 소공동에 경성상업회의소 건축 착공.

4월 8일

•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서울에서 조선민국임시정부 조직 포고문 · 정부창립 장정 · 각료 명단 등을 발표함. 정도령(正都領) : 손병희, 부도령(副都領) : 이승만.

4월 11일

•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함. 국호 · 관제를 제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공포함. 국무총리 이승만 등의 국무원 선출.

4월 12일

• 경성광화문금융조합 창립.

4월 13일

•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외에 정부 수립 선포.

4월 18일

• 종로경찰서,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 장중하(張重河) 등 5명을 <독립신문>, <독립경고문>, <반도의 목탁> 등 출판물을 발간 · 반포한 혐의로 체포함.

4월 23일

• 국민대회(國民大會),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수립을 발표하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임. ‘국민대회(國民大會)’ · ‘공화만세(共和萬歲)’ · ‘조선독립(朝鮮獨立)’ 등의 기를 들고 각종 전단을 살포하면서 동대문 · 남대문 · 종로를 행진, 보신각 앞에서는 임시정부수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 봉춘관에는 국민대회 간판을 닮.

• 종로경찰서,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로 서명한 이용규(李容珪) · 최전구(崔銓九) · 이래수(李來秀) · 유근(柳瑾) 등 4명을 체포함.

5월 1일

•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 설립 허가.

8월 12일

• 제3대 조선총독에 사이토(齋藤實) 임명.

8월 20일

• 서대문분서를 서대문서(西大門署)로 개칭함.

8월 29일

• 윤익선(尹益善) · 장채극(張彩極) 등이 국치기념호(國恥記念號)를 발간함.

9월 2일

• 강우규(姜宇奎), 남대문역 앞에서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짐. 3명의 사망자와 34명의 부상자를 냄.

9월 11일

• <대한민국임시헌법> 공포. 한성 · 상하이(上海) · 노령(露領) 정부를 상해임시정부로 통합함.

9월 18일

• 경성왜성금융조합(京城倭城金融組合) 창립.

10월 1일

• 임시정부, 서울의 1,038개 상점을 일시 폐점함.

10월 5일

• 태화관에서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 창립총회를 개최함.

10월 12일

• 경성 동아연초공장(東亞烟草工場) 노동자들이 파업함.

10월 29일

• 종로경찰서,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 이부인(李富寅) · 오성환(吳星煥) · 김일한(金一漢) 및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김완식(金完植) · 조광훈(趙光勳) 등 7명을 불온한 언동을 한 혐의로 검거함.

11월 10일

• 조선총독부 용산인쇄소 직공 150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동맹 파업함.

11월 11일

• 경성남대문금융조합 창립.

이달

• 경성 미곡시장에서 쌀 선물거래를 개시함.

12월 4일

• 경성부윤에 제등예삼(齊藤禮三) 임명.

이달

• 경성부 명치정(明治町, 명동)과 종로에 공설시장을 설립함.

이해

• 최남(崔楠), 종로2가 31번지에 여성전용 백화점인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를 설립함.

• 벨기에영사관 건물이 일본의 요코하마(橫濱) 생명보험회사에 매각되고 영사관은 충무로1가 18번지로 옮김.

• 1919년~1929년까지 약 300만 원을 투자하여 사대문 안팎의 시구개수(市區改修) 공사를 실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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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丙申年), 1896년
서울육백년사 연표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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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1901년
병오년(丙午年), 1906년
신해년(辛亥年), 1911년
병진년(丙辰年), 1916년
신유년(辛酉年), 1921년
병인년(丙寅年), 1926년
신미년(辛未年), 1931년
병자년(丙子年), 1936년
신사년(辛巳年), 1941년
병술년(丙戌年), 1946년
신묘년(辛卯年), 1951년
병신년(丙申年), 1956년
신축년(辛丑年), 196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