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 4년, 정묘년(丁卯年), 1867년
1월 12일
• 홍우길(洪祐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월 17일
• 이인석(李寅奭)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월 20일
• 《선원속보(璿源續譜)》가 완성됨.
2월 9일
• 영건도감에서 쓸 목재가 화재로 인해 소실됨.
2월 30일
• 각영이 지역을 나누어 한성 각 문(門)에서 3월 10일부터 통행세를 받도록 함.
4월 9일
• 춘당대(春塘臺)에서 과거시험을 시행하여 문과 46명, 무과 813명을 뽑음.
4월 10일
• 이풍익(李豊翼)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29일
• 의제(衣制)를 개혁함. 7월 1일부터 문음무당하관(文蔭武堂下官)의 표피각색전(豹皮各色氈)과 각색단속안갑(各色緞屬鞍甲) 및 명주[紬]를 사용한 의복 착용을 금하고, 사서인(士庶人)과 경향(京鄕)의 서리(胥吏) · 청지기[傔從] · 상민(常民) · 천인(賤人)의 50세 이하 자의 의복에 명주붙이 사용을 금함. 단 문음무당하관의 50세 이상 자는 저고리만 명주붙이를 사용하게 함.
5월 4일
• 당백전(當百錢) 주조를 5월 15일 이후에 정지하도록 함.
5월 7일
• 어영청(御營廳)의 실화로 군기고 15칸이 불에 타 창고 속에 있던 목면과 갑주(甲冑) 등 110건이 소실됨.
5월 15일
• 삼각산 · 목멱산 · 한강에서 첫 번째 기우제를 지냄.
5월 16일
• 《육전조례(六典條例)》가 간행 · 반포됨.
5월 18일
•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두 번째 기우제를 지냄.
7월 1일
• 진휼청에서 한성부 내에 무너진 민가 189호에 1호당 동 3냥씩 휼전을 베풂.
8월 18일
•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경복궁 각 건물과 문의 명칭을 정하여 올림.
9월 9일
• 한강에서 전함 진수식과 훈련대장 신관호(申觀浩)가 수뢰포(水雷砲) 시방(試放)을 거행함.
9월 10일
• 임금이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에 나아가 제사하고, 남한산성 온조왕현절사(溫祚王顯節祠)에 예관을 보내 치제함.
9월 25일
• 경기 인천 · 부평 · 안산 · 시흥 · 양천 · 교하 · 용인 · 과천 등 8개 고을의 대동미 중 절반은 미곡으로 탕춘창(蕩春倉)에 내도록 하고, 나머지는 돈으로 내게 함.
9월 29일
• 김병지(金炳地)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2일
• 동대문(흥인지문)이 전체적으로 훼손되어 개건공사에 들어감.
10월 5일
• 정문승(鄭文升)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1월 14일
• 경복궁 출입 때 승지는 영추문(迎秋門), 문관은 광화문의 동협문(東夾門), 무관은 서협문(西夾門)으로 출입하도록 함.
11월 16일
• 임금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대신들의 하례를 받고, 전국에 대사면을 발표함.
11월 23일
• 조석우(曺錫雨)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2월 30일
• 한성부에서 1867년 전국의 호구 수를 올림. 한성부 인구 20만 7,271명, 4만 5,6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