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 10년, 계유년(癸酉年), 1873년
1월 1일
• 박효정(朴孝正)을 특별히 발탁하여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5일
• 문과 시험에 합격한지 60돌이 되는 문경애(文慶愛)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아 노인을 우대하는 뜻을 보임.
2월 10일
• 선혜청 별창(別倉)의 화재로 곡식이 소실됨.
2월 12일
• 준천사(濬川司)에서 준천공사 실시 예정을 아룀.
2월 19일
• 이인응(李寅應)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20일
• 선혜청의 화재로 내탕금(內帑金) 1만 냥을 하사함.
2월 27일
• 선혜청 · 병조 · 세 군영 · 총융청 · 양향청에서 매 계절의 마지막 말일에 회계보고를 올리도록 정하고, 연말에 올리는 회계보고는 폐지함.
3월 5일
• 병조에서 부족한 창고 10여 칸을 증축함.
3월 12일
• 준천사가 송기교에서부터 준천공사에 착수함.
3월 20일
• 박제인(朴齊寅)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4월 15일
• 각사와 각영에서 봄철에 사용한 회계장부를 올림.
4월 21일
• 준천사에서 시행한 준천공사가 완공됨.
4월 26일
• 경무대에서 식년시(式年試)를 시행하여 문과 45명, 무과 28명을 뽑음.
5월 10일
• 강진규(姜晉奎)가 건청궁(乾淸宮) 공사가 사치스럽다고 상소함.
5월 16일
• 김세균(金世均) 등에게 수록되지 않은 정조 이후의 《기년아람(紀年兒覽)》을 계속 편찬하도록 함.
5월 24일
• 김익진(金翊鎭)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6월 7일
• 이경하(李景夏)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윤6월 11일
• 허전(許傳)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7월 4일
• 조구하(趙龜夏)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8일
• 민영위(閔泳緯)를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19일
• 임금이 경무대에서 정시문과(庭試文科)를 시행하여 문과 5명을, 무과 199명을 뽑음.
8월 23일
• 김병덕(金炳德)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26일
•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서문(閪門)에 들어갈 때 문세(門稅) 내는 것을 금지함.
9월 16일
• 이재원(李載元)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6일
• 심승택(沈承澤)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0월 10일
• 도성의 문세(門稅)를 받아 각 군영의 군수(軍需)에 사용하던 것을 폐지하고, 각 군영의 경비는 관세청에서 주도록 함.
• 종묘와 궁 부근에서 받던 세금도 문세와 함께 폐지함.
10월 15일
• 한성의 각사와 각영에서 가을철에 사용한 회계장부를 올림.
10월 25일
•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을 배척하고 시정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림.
10월 28일
• 성균관 유생들이 최익현(崔益鉉) 상소사건으로 인해 권당(捲堂)함.
11월 5일
• 11월 4일 밤 고종이 서무를 친정한다는 내용을 조지(朝紙)에 반포하도록 했으나 대신들이 불응하며 뜻을 이루지 못함.
11월 12일
• 최익현이 제주목(濟州牧)으로 유배됨.
12월 5일
• 도성 내의 거지들에게 은전을 내림.
12월 10일
• 경복궁 내 순희당(純熙堂)의 화약물 폭발로 자경전(慈慶殿) 등 궁전 400여 칸이 소실됨.
12월 11일
• 호조와 세 군영이 협조하여 창덕궁을 수리하도록 함.
12월 14일
• 수인문(壽仁門) 안쪽 행랑에서 화재가 발생함.
12월 20일
• 임금이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 · 왕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김.
12월 30일
• 한성부에서 1873년 전국과 오부의 호구 수를 보고함. 한성부 인구 19만 7,377명(남자 9만 6,945명, 여자 10만 432명), 호수 4만 5,7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