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현종]차왜 평성태가 관문을 함부로 나와 동래에 오다

[조선 현종]차왜 평성태가 관문을 함부로 나와 동래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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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왜(差倭) 평성태(平成太)가 관문(館門)을 함부로 나와 동래부에 왔다. 당초 예조가 대마 도주에게 답한 서계에 관(館)을 옮기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평성태가 서계를 보고 나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허락받지 못하면 결코 서계만 받고 돌아갈 수는 없다. 장차 아뢸 것이 있으니 두 대인(大人)이 편한 복장으로 와서 만나기 바란다. 오지 않으면 내가 스스로 가겠다.˝ 하였다. 접위관 신후재(申厚載), 동래 부사 정석(鄭晳)이, 이유없이 만나보는 것은 이미 법에 벗어나거니와 약조를 어기고 뜻대로 마구 나와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역관(譯官)을 시켜 타일렀더니, 평성태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약조 어기는 것을 논하는가. 두 나라의 유대 관계는 이제부터 끊어질 것이다. 두 대인이 거절하고 만나지 않으면 감영(監營)으로 갈 것이고, 감사가 또 만나지 않으면 서울로 가고야 말겠다.˝ 하고는, 상경하여 거듭 청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어서 그의 부하를 시켜 행장을 준비하게 하여 멋대로 나갈 듯한 자세를 보이면서 ˝허락받지 못하면 곧바로 강호(江戶)로 가겠다.˝고도 하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섬을 유람하겠다.˝고도 하였다. 이달 23일에 이르러 정관왜(正官倭)·부관왜(副官倭)·도선왜(都船倭)가 다 작은 가마를 타고 수행 왜인 2백여 인을 거느리고 관문을 뚫고 나왔다. 후재가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연정(李延禎)으로 하여금 두 진(鎭)의 토병을 거느리고 앞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나, 왜인이 칼을 뽑아 마구 휘두르며 길을 트고 곧바로 동래부에 이르렀다. 신후재 등이 어쩔 수 없이 별관(別館)에 묵게 하고 치계하여 알렸다. 일이 비국에 내려지자, 비국이 회계하기를, ˝차왜가 약조를 어기고 이러한 억지를 부리니, 그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그가 반드시 감영(監營)으로 가고자 하거나 곧바로 서울로 오려고 한다면, 도착한 뒤에 사리에 의거하여 엄히 물리쳐야 할 뿐입니다. 이제 잠시 그가 행동하는 대로 맡기되 다만 역관으로 하여금 따라오며 그가 하는 짓을 살펴서 계속 알리게 하여 조정에서 처치할 근거로 삼고, 접위관(接慰官)은 그들을 동래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면서 형세를 보아가며 행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평성태가 동래에 온 뒤에 신후재 등이 그가 약조를 어기고 함부로 나온 정상을 꾸짖으니, 평성태가 답하기를, ˝우리들이 나오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참으로 사정이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이번에 관(館)을 옮기는 일은 이미 강호에 여쭈어 정한 것인데, 조정에서 혹 그 사실을 통촉하지 못하여 이토록 망설이는 것은 아닌가? 허락받지 못하면 도주가 직임을 보전하기 어려운 형세이다. 그러면 귀국도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신후재 등이 치계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도주가 그 직임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따위의 말은 모두 공갈하고 협박하는 계책입니다. 그들이 반드시 상경하려고 하는데 타일러서 말리지 못한다면, 그들이 하는 짓을 보아가며 처리할 뿐이고 결코 탈 말을 주도록 허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서계는 이미 내려보냈으므로 추가로 고쳐서는 안 됩니다. 이 뜻으로 말을 만들어 타이르고 한편으로 엄히 물리쳐서 빨리 관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서계의 문구는 그 뒤에 차왜가 굳이 자신들의 뜻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고쳐 보냈다. 후재(厚載)는 처사가 경망스러워 왜인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 왜차(倭差)가 무리를 거느리고 칼을 빼들고 후재가 묵은 관사로 곧바로 이르러 갖은 방법으로 공갈하였는데, 후재는 질겁을 하여 어쩔줄 몰라하였다. 말을 타고 도망해 나오려 할 때 왜인에게 붙잡혀 수염을 잡히고 모욕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이어 수십 일 동안 잡혀서 차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다가 마침 병으로 죽은 자가 있어 이로 인해 풀려나 돌아왔다. 양국이 외교 관계를 맺은 이래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후재가 나라를 욕되게 하였다고 중한 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장인 허적이 바야흐로 수상으로서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일이 유야무야되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 12년 8월 27일(을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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