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헌종]돌아온 사신 이정리가 중국의 구휼 제도와 서양과의 관계를 아뢰다

[조선 헌종]돌아온 사신 이정리가 중국의 구휼 제도와 서양과의 관계를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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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사신(使臣)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서장관(書狀官) 이정리(李正履)가 바친 문견 별단(聞見別單)에 이르기를, ˝신이 요동(遼東)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밖에 이르러 노농(老農)과 민호(民戶)에게 한 해에 세로 바치는 수를 물었더니, ˝전(田) 10무(畝)를 1일경(日耕)이라 하여 바치는 세곡(稅穀)이 3두(斗) 2승(升)이고, 정역(丁役)은 한 해에 바치는 것이 은(銀) 6전(錢) 3푼(分)인데, 두 역(役)을 마친 뒤에는 백성이 한 해를 다하도록 한가하게 살며 생업을 영위하고 다시는 조금도 뒤미처 징수를 요구하는 단서가 없으며, 연호(煙戶)의 역은 모두 없앴다. 강희(康熙) 때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곡식이 귀할 때에는 값을 줄여서 조곡을 내는 방도로 삼았는데, 이제까지 준행하고 있다. 광제원(廣濟院)이 있어서 중병을 앓는 사람을 구완하고, 서류소(棲流所)가 있어서 유산(流散)한 백성을 살게 하고, 휼리원(恤釐院)이 있어서 늙고 지아비와 집이 없는 자를 살게 하고, 육영당이 있어서 버려진 어린아이를 기르며, 또 경도(京都)의 부유한 백성이 곳곳에 의죽창(義粥廠)을 설치하여 가난한 백성을 먹인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스스로 육영당과 의죽창에 ??여러 번 살펴보았더니, 죽을 장만해 주는 곳에서는 남녀가 줄을 나누어 정돈하여 법도가 있었고, 육영당에서는 유모(乳母)를 모집하여 먹여 기르는 것이 적당하였습니다. 중국은 근년에 또한 재물이 다 떨어져서 백성이 군색함을 걱정하고 있는데, 신이 지식 있는 조신(朝紳)에게 조용히 탐문하였더니, ˝ 건륭(乾隆) 때부터 사관(寺觀)의 역사(役事)와 유행(遊幸)의 경비에 재용(財用)이 크게 축났고, 이어서 도둑을 징벌하는 전역(戰役)과 해마다 황하(黃河)를 다스리는 경비가 있었다. 또 기이하고 간사하고 공교하고 사치한 물건으로 백성을 현혹하고 재물을 손실하게 하는 것은 다 서양 배에서 오므로, 서양에 흘러 들어가는 은화(銀貨)가 해마다 1백만 냥에 밑돌지 않는데,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서번승(西番僧) 준단파호도극도(遵丹巴呼圖克圖)가 내조(來朝)하였을 때에 황제가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지위가 친왕(親王) 위에 있었고, 돌아갈 때에는 황옥교(黃屋轎)를 내어주어 보내라고 명하였더니, 황옥교를 줄 때에 만주 근신(滿洲近臣) 역기(奕紀)가 황산(黃傘) 등 의장(儀仗)도 아울러 주었다. 이 때문에 정신(廷臣)이 아뢰어 역기가 중죄를 받아 극변(極邊)에 귀양갔다.˝ 하였습니다. 저 나라에서는 사교(邪敎)가 민간에 물들어 걱정이 점점 커지므로, 근년 이래로 엄중히 금지하여 천주당(天主堂)을 모두 헐어 없애고 서양 사람도 쫓아 보냈다 하니, 이때부터 사교의 근거를 엄중히 끊는 것을 기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길리국(英吉利國)은 서양과 천주사교(天主邪敎)를 같이 배웠는데, 광동(廣東) 바다에 왕래하며 중국 문자를 배우고 중국 의복을 본받아 입으며, 그 화기(火器)가 더욱 교독(巧毒)하므로, 해외(海外)의 홍모(紅毛) 와 여송(呂宋) 여러 섬이 다 이미 그 가르침을 따라 배웠다고 합니다. 바닷가의 간사한 백성이 향도(嚮導)가 되어 처음에는 바다에서 교통하며 무역하려 하였으나, 중국에서 굳게 허락하지 않았더니, 이 때문에 크게 노여움을 불러서 해마다 변경(邊境)에 와서 어지럽히므로, 올해에 황제의 명으로 특별히 친근한 중신(重臣)을 보내어 가서 변경을 안찰(按察)하게 하였는데, 이제는 또 복건(福建)에서 대만(臺灣)으로 옮아 들어갔다 합니다.˝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헌종 6년 3월 25일(을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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