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대방진굴항

사천 대방진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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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진굴항은 고려시대 우리나라 연안(沿岸)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방비하기 위하여 설치한 구라량(仇羅梁)의 영(營)이 있던 곳으로 수군만호가 있었다. 그 뒤 구라량이 폐영(廢營)이 되면서 소규모의 선진(船鎭)으로 남아 있다가 조선시대 말경 순조 때 비로소 이곳에 굴항(掘港)을 축조하였다. 이 역사에는 진주목에서 관내 72개 면민을 동원하여 부역을 시켰으며 굴항이 축조된 다음에는 이곳에 조곡 운송선과 전함이 정박했다.
• 출처 : 사천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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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대방진굴항

사천 대방진굴항 조선 순조(純祖) 때 창선도(昌善島)와 적량첨사(赤梁僉使)와의 군사연락을 위해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에 축조한 항만이다.

사천 대방진굴항

사천 대방진굴항 조선 순조(純祖) 때 창선도(昌善島)와 적량첨사(赤梁僉使)와의 군사연락을 위해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에 축조한 항만이다.

사천 대방진굴항

사천 대방진굴항 조선 순조(純祖) 때 창선도(昌善島)와 적량첨사(赤梁僉使)와의 군사연락을 위해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에 축조한 항만이다.

사천 대방진굴항

사천 대방진굴항 조선 순조(純祖) 때 창선도(昌善島)와 적량첨사(赤梁僉使)와의 군사연락을 위해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에 축조한 항만이다.

사천 대방진굴항

사천 대방진굴항 대방진 굴항은 고려시대에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구라량의 진영이 있던 곳이다. 그 뒤 구라량이 폐쇠되어 쇠퇴했던 것을 조선 순조(재위1801∼1834) 때 진주 병마절도사가 진주목 관하의 창선도와 적량첨사와의 군사적 연락을 위해, 둑을 쌓아 굴항을 만든 것이다. 당시에는 300여 명의 상비군과 전함 2척을 상주시켜 병선의 정박지로 삼고 왜구를 방어하였다.

사천 대방진굴항

사천 대방진굴항 대방진 굴항은 고려시대에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구라량의 진영이 있던 곳이다. 그 뒤 구라량이 폐쇠되어 쇠퇴했던 것을 조선 순조(재위1801∼1834) 때 진주 병마절도사가 진주목 관하의 창선도와 적량첨사와의 군사적 연락을 위해, 둑을 쌓아 굴항을 만든 것이다. 당시에는 300여 명의 상비군과 전함 2척을 상주시켜 병선의 정박지로 삼고 왜구를 방어하였다.

사천 대방진굴항

사천 대방진굴항 대방진 굴항은 고려시대에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구라량의 진영이 있던 곳이다. 그 뒤 구라량이 폐쇠되어 쇠퇴했던 것을 조선 순조(재위1801∼1834) 때 진주 병마절도사가 진주목 관하의 창선도와 적량첨사와의 군사적 연락을 위해, 둑을 쌓아 굴항을 만든 것이다. 당시에는 300여 명의 상비군과 전함 2척을 상주시켜 병선의 정박지로 삼고 왜구를 방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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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진굴항 대방진굴항은 고려시대에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구라량의 진영이 있던 곳이다. 그 뒤 구라량이 폐쇠되어 쇠퇴했던 것을 조선 순조(재위1801∼1834) 때 진주 병마절도사가 진주목 관하의 창선도와 적량첨사와의 군사적 연락을 위해, 둑을 쌓아 굴항을 만든 것이다. 당시에는 300여 명의 상비군과 전함 2척을 상주시켜 병선의 정박지로 삼고 왜구를 방어하였다.

출처: 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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