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해룡산성

순천 해룡산성

분류 교통/통신/지리 > 해양문화사전 > 해양사 > 관방체제

순천시 해룡산성은 해발 54-76m의 봉우리와 작은 계곡들로 이루어진, 나지막한 야산에 축조된 산성이다. 청암대학에서 대대포구로 이어지는 도로 곁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성 내부의 대부분이 밭으로 개간되어 있을 만큼 완만하면서 야트막한 지대를 동북, 서북, 남서 방향에서 두루 감싸안는 모습으로 현재 남아있다. 이 지역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인간이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차츰 주민이 늘어나 상당한 규모로 취락이 형성되면서 백제가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는 방어를 위한 구조물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룡산에 처음 토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을은 삼국시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가장 번창한 것은 신라말 고려초의 시기였다. 당시 해룡산성에는 순천을 지배하던 대호족 박영규가 웅거하고 있었다.그는 연안 해상교통의 요충이라는 지리적 잇점을 바탕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견훤의 사위로서 후백제의 유력자였던 그는 훗날 견훤을 따라 고려에 귀부하였다. 고려에서도 그는 태조 왕건과 그의 아들 정종에게 세 딸을 납비함으로써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박영규의 그러한 출세바탕은 말할 것도 없이 해룡산성이었다. 또한 그의 출세v 해룡산성지역을 더역 번영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해룡산성에는 한 차례 대규모의 보수 증축 공사가 가해졌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 또한 지역의 그 같은 번성과 박영규의 출세를 배경으로 가능하였을 것이었다. 그토록 번창하던 해룡산성 지역에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고려왕조가 차츰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이었다. 해룡산성 지역이 첫 번째로 타격을 입은 것은 개경에 입성하여 승승장구하던 박영규가 광조의 왕권강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실각하면서부터였다. 거기에 성종대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고 지방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자, 지방에서의 자유로운 해상활동은 규제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마침내 조세와 공물의 집산지이자 그것을 왕경으로 운송하는 조창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자유롭고 생기발랄한 해상세력의 근거지에서 중앙정부의 뒷받침을 받는 자그마한 지역경제의 한 축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왕조의 체제 정비와 함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해룡산성 지역은 고려 말 조선초에 이르러 쇠락을 거듭한 끝에 폐허로 변하였다. 왜국의 창궐로 지역이 참혹한 피해를 입었던 데다 조운이 중단됨으로써 해룡창이 폐쇄된 데 따른 일이었다. 더욱이 이사천과 동천이 쏟아내는 토사의 지속적인 퇴적은 조양포의 기능마저 마비시켰다. 포구와 조창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축조되고 유지되어 온 해룡산성에게 더 이상의 존재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한 상황이 되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가운데 폐허로 변하여 오늘에는 그 자취마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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