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안점산봉수대

사천 안점산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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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점산 봉수대는 사천시 용현면 신복리와 사남면 화전리의 경계인 안점산(鞍岾山)에 위치하고 있다. 이 봉수는 고려 때 봉수인 침지(針枝)및 성황당(城隍堂) 봉수를 폐지하고 조선 세종 때 새로 설치한 봉수이다. 와룡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자락 봉우리인 해발 310m 상봉에 봉수대와 둘레 약 100m의 성지(城址)가 있다. 남쪽으로는 각산(角山) 봉수와 마주 응답하고 북쪽으로는 진주의 망진산(望晋山) 봉수와 서로 마주보며 응답했다. 세종 4년(1422) 8월, 봉수하는 장소에 높게 연대(煙臺)를 쌓고 활 쏘는 집(궁가,弓家)과 화포와 병기를 설치하여 밤낮으로 그 위에서적의 변동을 관망하였으며 봉수군 245명을 두었다고 기록에 전한다. 봉수(봉화)라 함은 사방의 관망이 좋은 산위에다 일정한 장소를 정하여 횃불을 올리는 것을 말하며, 고대(古代) 통신 방법의 하나로 인편(人便)에 의한 방법 외에 높은 산에 올라가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정하여 실시한 시기는 고려 의종(毅宗) 3년(1149)부터라 한다. 봉수의 방법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하되 평상시는 한번 올리고 2급(急) 시는 두번, 3급시는 세번, 4급시는 네 번씩 올렸다. 조선에서는 세종 때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하였는데 평시에는 횃불을 한 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넘어오면 4개, 접전을 하면 5개를 올렸다. 만약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이 불가능 할 때는 봉졸(烽卒:봉군)이 차례로 달려서 보고하였다. 각 봉수대의 인원은 연해(沿海)와 변경지방은 군사 10명, 오장(伍長) 2명씩을 두었는데 이들은 봉화대 근처에 사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봉화대에 배치되는 봉군은 다른 군역(軍役)에 종사할 수 없으며 오직 망보는 일에만 종사하게 했다. 봉화대는 표주(標柱)를 세워 경계를 설정하고 무당이나 토속신앙에 의한 잡신제사를 일절 금했다. 당시 봉수망의 종점은 서울 남산(목멱산)에 있었으며 간선(幹線)을 직봉(直烽)이라 하고 보조선을 간봉(間烽)이라 했다. 그런데 이 봉화를 옛날에는 승냥이의 똥으로 태웠다고 하는데 승냥이 똥에는 인(燐)이 많이 섞여 있어서 불빛이 푸르고 밤에는 더욱 멀리 보이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기나 기상관계로 봉화를 올릴 수 없을 때에는 봉군(烽軍)이 직접 뛰어가서 전하기도 하였다.
• 출처 : 사천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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