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통영성

통영 통영성

분류 교통/통신/지리 > 해양문화사전 > 해양사 > 관방체제

통영성은 왜적을 방어하고 거주지와 생업지를 갈라 놓는 두 가지 목적으로 1678년(숙종 4)에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축성하였다. 해발 174.2m, 높이 4.7m, 너비 4m, 둘레 약 3,660m이다. 북문 북쪽의 여황산 기슭에서 서문 북쪽의 산기슭까지 여황산 양쪽 등성이 약 1km는 토성이고 나머지는 석성이다. 토성은 산등성이를 이용하여 기단부는 삭토식(削土式)으로 조성하다가 상부로 오면서 석심(石心)을 넣고 흙을 다지면서 사다리꼴 모양으로 쌓았고, 석성은 남문을 위시한 4대문과 2암문(暗門) 양쪽에는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무사석으로 협축(夾築)하였다. 나머지 부분은 지세를 따라 사행(蛇行)으로 가면서 자연석으로 바깥쪽을 물림쌓기로 축성하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밋밋하게 쌓아올린 내탁공법을 취하였다. 옛 통영성에는 동서남북 4대문과 2암문, 그리고 동·서·북쪽에 3포루(鋪樓)가 있었다. 동문은 홍예문(虹霓門)으로 축성할 때 함께 지었는데, 1748년 통제사 장태소(張泰紹)가 신흥문(新興門)이라는 편액을 문루에 걸었고, 1792년 통제사 이윤경(李潤慶)이 고쳐 지으면서 춘생문(春生門)이라 하였다. 서문 역시 홍예문으로 축성 때 함께 지었는데 1790년 통제사 신응주(申應周)가 고쳐 짓고 금숙문(金肅門)이라 하였다. 남문도 홍예문으로 축성시에 지었는데 일명 청남루(淸南樓)라 하였다. 1843년 통제사 허계(許棨)가 중수하였다. 북문은 통영성을 축성할 당시에는 문루가 없었으나 1771년 통제사 원중회(元重會)가 문루를 짓고 이름을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는데, 일명 의두문(依斗門)이라고도 하였다. 동·남의 두 암문은 성을 쌓을 때 함께 만들었는데 문루가 없었다. 동암문은 일명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렸는데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항상 잠가 두었다고 한다. 3포루는 1694년 통제사 목림기(睦林奇)가 세웠다.

사진

1953년 퇴락한 세병관

1953년 퇴락한 세병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군사상의 취약점을 고려하여 만든 통제사의 본영이 있던 터이다. 당시의 통제영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세병관 뿐이며,통제사 내아인 운주당·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이, 통제사 집무실이었던 백화당과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납품한 공고(12공방·선자방)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그 밖에 파취헌·분뇨정 등의 지역에는 충렬여자중·상업고등학교가 각각 위치하는 등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에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 있다.

통영 통제영지 세병관

통영 통제영지 세병관 2002년 10월 14일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크기는 정면 9칸 112자, 측면 6칸 56자이다. 단층 팔작지붕이다. 1603년(선조 36)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 완성된 이후에는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4면이 모두 개방되고 내부도 막힌 벽이 없이 기둥만 정연하게 배열되었다. 전후면에서 안쪽으로 제2주열(柱列)에 각각 고주(高柱)를 한 줄로 세워 그 위에 대량(大樑)을 걸쳤으며 이 고주와 변주(邊柱)는 퇴량(退樑)으로 서로 연결하였다. 건물 측면의 가운데 있는 기둥에서부터 대량에 걸쳐 충량(衝樑)이 배치되었다.

통영 통제영지 세병관 간판

통영 통제영지 세병관 간판 세병관 간판의 모습이다.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에서 따 왔다고 한다.

통영 정화사업 전의 세병관

통영 정화사업 전의 세병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군사상의 취약점을 고려하여 만든 통제사의 본영이 있던 터이다. 당시의 통제영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세병관 뿐이며,통제사 내아인 운주당·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이, 통제사 집무실이었던 백화당과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납품한 공고(12공방·선자방)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그 밖에 파취헌·분뇨정 등의 지역에는 충렬여자중·상업고등학교가 각각 위치하는 등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에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 있다.

통영 이충무공유적지 세병관

통영 이충무공유적지 세병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군사상의 취약점을 고려하여 만든 통제사의 본영이 있던 터이다. 당시의 통제영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세병관 뿐이며,통제사 내아인 운주당·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이, 통제사 집무실이었던 백화당과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납품한 공고(12공방·선자방)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그 밖에 파취헌·분뇨정 등의 지역에는 충렬여자중·상업고등학교가 각각 위치하는 등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에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 있다.

통영 세병관(원경)

통영 세병관(원경) 세병관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 두룡포에 옮겨온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 그해 7월 14일에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客舍)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웅장한 건물로 모든 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칸(通間)으로 개방하였다. 우물마루로 된 평면바닥의 중앙일부를 한단 올려 놓았다.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이지만, 익공식(翼工式) 수법과 다포식(多包式) 수법이 많이 보인다.

1900년대 통영 세병관 통영성 남문

1900년대 통영 세병관 통영성 남문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군사상의 취약점을 고려하여 만든 통제사의 본영이 있던 터이다. 당시의 통제영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세병관 뿐이며,통제사 내아인 운주당·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이, 통제사 집무실이었던 백화당과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납품한 공고(12공방·선자방)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그 밖에 파취헌·분뇨정 등의 지역에는 충렬여자중·상업고등학교가 각각 위치하는 등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에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 있다.

1900년대 통영 세병관 통영성 남문

1900년대 통영 세병관 통영성 남문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군사상의 취약점을 고려하여 만든 통제사의 본영이 있던 터이다. 당시의 통제영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세병관 뿐이며,통제사 내아인 운주당·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이, 통제사 집무실이었던 백화당과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납품한 공고(12공방·선자방)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그 밖에 파취헌·분뇨정 등의 지역에는 충렬여자중·상업고등학교가 각각 위치하는 등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에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 있다.

통영 세병관 입구

통영 세병관 입구 세병관 입구의 모습이다. 세병관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 두룡포에 옮겨온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 그해 7월 14일에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客舍)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웅장한 건물로 모든 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칸(通間)으로 개방하였다. 우물마루로 된 평면바닥의 중앙일부를 한단 올려 놓았다.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이지만, 익공식(翼工式) 수법과 다포식(多包式) 수법이 많이 보인다.

통영 세병관 밑 중영

통영 세병관 밑 중영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군사상의 취약점을 고려하여 만든 통제사의 본영이 있던 터이다. 당시의 통제영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세병관 뿐이며,통제사 내아인 운주당·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이, 통제사 집무실이었던 백화당과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납품한 공고(12공방·선자방)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그 밖에 파취헌·분뇨정 등의 지역에는 충렬여자중·상업고등학교가 각각 위치하는 등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에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 있다.

통영 세병관 망일루

통영 세병관 망일루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군사상의 취약점을 고려하여 만든 통제사의 본영이 있던 터이다. 당시의 통제영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세병관 뿐이며,통제사 내아인 운주당·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이, 통제사 집무실이었던 백화당과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납품한 공고(12공방·선자방)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그 밖에 파취헌·분뇨정 등의 지역에는 충렬여자중·상업고등학교가 각각 위치하는 등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에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 있다.

통영 세병관 망궐례

통영 세병관 망궐례 망궐례는 세병관에서 수행하던 배례의식이다. 임금에 대한 공경과 충성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초하루와 보름, 두 번의 정규례 외에 설, 단오, 추석 등 명절과 왕과 왕비의 생일 등 특별한 날에 올렸는데, 통제사가 주재했다. 이는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근무하는 통제사(뿐만 아니라 관찰사, 목사, 부사 등도 해당)가 임금을 직접 배알할 수 없었기에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놓고 의식을 행한 것이다.

통영 세병관 궐패단

통영 세병관 궐패단 세병관 내부에 궐패를 모시는 궐패단의 모습이다. 궐패단은 여타의 공간과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루보다 단이 높고, 상부는 우물천장으로 막았으며, 좌우에 홍살문을 두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고 의식을 행할 때는 분합문을 내려 다른 공간과 확실히 구분하였다.

통영 세병관 수항루

통영 세병관 수항루 세병관 입구에 있는 수항루는 임진왜란의 승첩기념으로 건립된 누각이다.

통영 세병관

통영 세병관 세병관은 1605년 이경준 통제사에 의해 준공되었으며,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1층의 단일 건물로는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함께 국내 최대 건물로 손꼽힌다.

통영 세병관

통영 세병관 세병관은 1605년 이경준 통제사에 의해 준공되었으며,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1층의 단일 건물로는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함께 국내 최대 건물로 손꼽힌다.

통영 세병관

통영 세병관 세병관은 1605년 이경준 통제사에 의해 준공되었으며,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1층의 단일 건물로는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함께 국내 최대 건물로 손꼽힌다.

통영 세병관 지과문

통영 세병관 지과문 세병관의 두 번째 문인 지과문(止戈門)은 ''창을 그친다''는 의미인데 창(무력)을 그만 사용하고 싶다는 것은 곧 평화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통영 세병관 망일루

통영 세병관 망일루 세병관의 첫 관문이자 정문인 망일루(望日樓) 아래 계단은 24개로써 24절기를 상징한다. 400여년 전의 그 돌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망일루는 ''해를 바라다 보는 누각''이란 뜻이며, 해는 임금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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