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변효문과 윤인보를 통신사로 일본에 보내다

[조선 세종]변효문과 윤인보를 통신사로 일본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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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갈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인 변효문(卞孝文)과 부사(副使)인 상호군(上護軍) 윤인보(尹仁甫)가 떠나매, 불러 보고 효문에게 이르기를, ˝내 너의 모친이 연로(年老)한 것을 아노라. 내 신하들로서 노친이 있는 자는 3백리 밖의 수령을 제수하지 않았는데, 이제 너를 보내는 것은 전대(專對)하는 소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한 것이니, 네 안심하고 갔다 오라.˝ 하고, 인하여 효문과 인보에게 옷과 갓과 신을 내려 주었다. 그 싸 가지고 가는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귀국(貴國)과 더불어 대대로 이웃의 사이 좋음을 닦아 왔는데, 이에 바다가 가로 막히어 소식이 제때에 닿지 못하므로 늦게야 사위(嗣位)함을 들으매, 기쁨과 부끄러움이 함께 이르는지라, 이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변효문(卞孝文)과 상호군(上護軍) 윤인보(尹仁甫)를 보내어 축하의 성의를 전달하고 약소한 토산물을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어 보내니, 다행히 그대로 받기를 바라노라. 말 안장[鞍子] 1벌, 검은 마포[黑麻布] 20필, 흰 모시[白苧布] 20필, 흰 면주(綿紬) 20필, 남사피(藍斜皮) 5벌, 인삼(人蔘) 1백 근, 표범 가죽 방석[豹皮坐子] 1? 표범 가죽 10벌, 범의 가죽 10벌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국왕을 제사하는 글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영혼이여, 일찍이 선업(先業)을 이어 일국에 군림[撫臨]할 제, 빙문(聘問)으로 서로 사귀고 이웃으로 좋게 지냄이 더욱 돈독하더니, 하늘이 어찌 굽어보지 아니하여 문득 영원히 막히게 되고, 부음을 들은 뒤로 깊이 슬프고 애석해 하노라. 이에 사신을 보내어 약소한 제물을 베풀게 하니, 영령(英靈)이 만일 있거든 흠격(欽格)하기를 바라노라.˝ 하고, 그 대내전(大內殿)을 제사하는 글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영혼이여, 거진(巨鎭)을 거느리어 위명(威名)이 융성한데, 계통이 우리나라에서 나와서 항상 관곡(款曲)한 정을 받아들이므로 내 의리를 가상히 여김이 날로 돈독하여 잊지 않더니, 홀연히 부음을 들으니 깊이 마음 아프도록 슬프도다. 사람을 시켜 약소한 제물을 베풀고 이에 안타까운 뜻을 표하노니, 영령이 알음이 있거든 한잔 술을 흠향하기 바라노라.˝ 하고, 예조(禮曹)로 하여금 대내전(大內殿)에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멀리서 듣건대, 족하(足下)가 선업(先業)을 이어받았다 하니, 실로 깊이 기쁘게 치하하오. 생각건대, 선인(先人)은 우리나라와 사이 좋게 지냄이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으니, 족하도 선지(先志)를 잘 이어받아 세교(世交)를 더욱 돈독히 하기를 바라오. 우리 전하께서 이제 통신사(通信使)를 통하여 약소한 토산물로 흰 면주(綿紬) 10필, 호피 방석 1벌과 홍전모(紅氈毛)·상모(象毛)·옥정자(玉頂子)·도금대옥(鍍金臺玉)·압영아(壓纓兒)·자초영 모두 하나씩과 인삼(人蔘) 50근, 청사피(靑斜皮) 3벌, 흑사피(黑斜皮) 3벌, 잡채화석(雜彩花席) 15장, 표범 가죽 3벌, 범의 가죽 4벌, 꿀 10말, 잣 70근을 보내니, 뜻에 맞지 않을지라도 받아 주기를 바라오.˝ 라고 하였다. 또 예조로 하여금 구주(九州) 서부(西部)의 소이 좌무위(小二左武衛)와, 관서도 대우(關西道大友)와, 우리나라 관령(管領)의 대마주(對馬州) 태수(太守)와, 일지주 좌지(佐志)와, 구주 송포(九州松浦)의 좌지(佐志) 등처에 글을 보내고 겸하여 예물도 보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2월 21일(정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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