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예문관 대제학 박안신의 졸기

[조선 세종]예문관 대제학 박안신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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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관 대제학 박안신(朴安臣)이 졸(卒)하였다. 안신(安臣)의 자(字)는 백충(伯忠)이요, 상주(常州) 사람인데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박문로(朴文老)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사관(史官)에 보직되고, 무자년에 사간원 좌정언을 제수받았다. 대사헌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목인해(睦仁海)의 사건을 다스리다가 태종(太宗)의 뜻에 거슬려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사성(思誠)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있으니 무얼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하고, 시(詩)를 지어 벽 뒤에 썼다. 여러 번 옮겨 사헌 집의가 되고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가 되었다. 갑진년에는 일본(日本)에서 사신을 보내어 와서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였다. 국가에서 허락하지 않고 안신(安臣)을 보내어 회례사(回禮使)를 삼고 예물과 불경(佛經) 두어 권을 보내었다. 그 지경에 이르니 일본왕이 국가에서 대장경판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거절하여 들이지 않고, 오직 불경만 들이는 것을 허락하였다. 안신(安臣)이 치서(馳書)하여 교린(交隣)의 뜻으로 타이르니, 그제서야 예접(禮接)을 허락하였다. 돌아올 때에 일기도에 이르니, 우리와 원망이 있는 한 왜인이 사신의 배를 향하여 보복하려 하였다. 안신이 곧 배에 올라 적에게 이르기를, ‘고금으로 어찌 사신을 죽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적이 마침내 범하지 못하였다. 돌아와 사간원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가 되고, 공조·예조·병조 참의와 병조·예조·형조·공조·이조 참판과 사헌부 대사헌과 황해·충청·전라·평안도 감사를 거치고, 기미년에 형조 판서를 제수하고, 명년에 의정부 우참찬에 옮기고, 임술년에 공조 판서로 나이가 많아 물러가기를 청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이조 판서에 발탁되고, 갑자년에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에 옮기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9세였다. 조회를 2일 동안을 정지하고 조의(弔儀)와 부의(賻儀)를 내렸다. 안신의 성품은 강하고 과감하고 담론(談論)을 잘하고 집을 다스리는 것이 검소하였다. 시호(諡號)를 정숙(貞肅)이라 하였으니, 곧은 도리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정(貞)이요, 마음을 잡아서 결단하는 것이 숙(肅)이다. 아들은 박이창(朴以昌)·박이령(朴以寧)이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세종 29년 11월 9일(무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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