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회의 성립

중세사회의 성립

통일신라시대부터 후삼국의 성립까지

시대명 고대/남북국

에 의한 삼국통일은 가 지배하던 만주 지역을 상실한 불완전한 것이었으나, 한편 만주 일대에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발해가 건국되어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순한 영토병합과 왕조교체가 아니라 중세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커다란 사회변동을 수반한 것이었다.

수 세기 동안 계속된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막대한 전쟁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경제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긴요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전의 노예제적인 생산관계를 조정하여 농민층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켜야 했다.

사회적 생산력이 발전함으로써 토지가 중시되었고, 경작 과정에서 소농경영이 자리 잡은 것을 바탕으로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신장되었다.

토지의 사적 소유가 발달하면서 소토지 소유 농민이 늘어났는데, 국가에서는 수취기반인 소토지 소유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丁田)을 지급하여 경작지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한편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의 왕실·귀족 불교사원은 토지소유를 크게 확대했는데, 이러한 지배층의 대토지는 자기 소유 를 부리거나 용작인(傭作人)을 고용하여 직영하기도 했으나, 많은 경우 전호 농민으로부터 지대를 수취하는 지주제 경영을 하였다.

이러한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하여 수조권 분급제가 시행되었다. 토지분급은 민호에 대한 지배까지도 의미하던 식읍제에서 수조권만을 주는 제로 변화되었는데, 녹읍은 고을 단위로 주어져 여전히 농민에 대한 불법적 억압·착취가 가능했으며 귀족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데 이용되었다. 이에 관료들에게 일정 면적의 수조지를 주는 제도로 전환하고자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중세적 토지제도가 성립되고 농민들이 귀족들의 인신적 지배에서 벗어나게 됨에 따라, 종래 귀족들의 세력기반이었던 부(部) 중심의 정치체제가 지양되고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제가 강화되어갔다. 를 정점으로 한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가 갖추어짐에 따라 귀족회의 의장인 의 지위가 낮아지고 집사부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한편 토착세력을 매개로 한 지방지배체제를 해체하고 국왕이 지방을 직접 지배하는 군현제를 성립시켰다.

집권적 지배체제가 정비됨과 아울러 국가는 농민을 공적 통치대상인 공민으로 편제하여 국역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에 모든 양인을 에 편입시켜 국역을 부담하지 않는 천인과 구분하고자 했다.

그러나 공민으로서의 양인을 천인과 구분하는 것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 하여, 3~1두품에 편제된 평민들 사이의 등급의 구분은 점차 소멸되고 골품제는 지배층 내부의 계층관계를 나타내는 신분제도로 기능했다. 신라의 골품제도는 진골이 왕족 또는 최고 귀족으로 중요한 관직 독점 등 여러 특권을 누리고, 골품에 따라 관등·관직 진출의 상한은 물론 집·옷·그릇·수레 등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차등이 명확하게 규정되고, 상위 골품으로 올라갈 수 없는 폐쇄적인 신분제도였다. 양 신분 내부에서 엄격하게 신분을 구별한 것이 골품제의 특징이었다.

이와 같이 통일을 전후하여 가 진전되는 가운데 집권적 지배체제가 정비되어갔는데, 무열왕계가 집권한 시기는 이러한 봉건적 정치체제를 갖추어 나간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체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고대적인 성격의 귀족세력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고 성립된 신라 봉건사회에는 여전히 많은 모순이 내재해 있었으며, 8세기 후반 이후에는 전반적인 체제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녹읍을 토대로 전장을 확대한 귀족들은 이를 기반으로 왕위쟁탈전을 벌였으며, 농민들은 지배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지방에서 새로이 성장한 세력이 농민들을 포섭하는 가운데 고려가 건국됨으로써 고대적인 잔재가 남아 있던 신라 골품제사회는 붕괴되고 봉건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