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시대

철기시대

[ 鐵器時代 ]

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시대구분의 명칭으로, 광의의 철기시대는 인류가 철을 이용하여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를 말한다. 이러한 삼시대법은 덴마크를 중심으로 하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시작되었다. 톰센(Thomsen)은 1836년에 간행된 덴마크 국립박물관 안내책자에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도구에 따라 돌, 청동 및 철의 순서로 계승되었다고 설명하였고, 그의 제자인 월사에(Worsaae)가 층위적인 발굴을 통해 이를 보완하면서 선사시대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으로 나누는 삼시대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삼시대법은 곧 바로 전 유럽과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었다.

그 후 프랑스에서 구석기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석기시대는 러복(Lubbock)에 의해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로 분리되었고, 웨스트롭(Westropp)에 의해 중석기시대의 개념이 제시된 연후에 다섯시대가 되었다. 이 삼시대법은 20세기 전반까지 고고학의 중요한 방법이었으나, 점차 이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즉 차일드(Childe)는 이와 같은 시대구분을 떠나 식량채집자들, 농업혁명, 도시혁명이라는 개념으로 선사문화를 설명하였고, 프류어(Fleure)나 피곳(Piggott) 등에 의해 삼시대법의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보편화되고 문화가 다양하게 설명되면서 도구발전에 따른 시대구분은 더 이상 유럽의 선사문화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철(鐵)은 청동기(靑銅器)에 이어 새로운 금속(金屬)으로 발견되었다. 인류가 철을 최초로 이용한 예는 B.C. 4000년대에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철제구슬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자연산 그대로의 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다. B.C. 3000년대 초반이 되자 근동지방의 시리아, 바그다드 같은 지역에서 철의 정련(精鍊)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제련철(製鍊鐵)로 이루어진 유물 중 가장 오해된 것은 제철단검이었다.

철을 녹이기 위해서는 섭씨 1,000˚이상의 온도가 필요한데 인류는 제련기술이 발달되기까지 오랫동안 청동기만을 사용하였다. 본격적으로 철을 사용한 것은 B.C. 1400년경 히타이트(Hittite)왕국의 출현에 의해서다. 약 200년경 후 히타이트 왕국이 멸망하게 되자 그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철에 대한 지식이 근동지방 전역에 보급되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에 의해 무기 뿐 아니라 농기구까지도 제작되었으며, B.C. 10세기경에는 전 유럽이 철기문화로 접어들게 되었다.

동양에서는 중국(中國) 은(殷)대의 유물로 날부분을 철로 쓴 청동도끼가 가장 오래된 예가 되는데, 철기가 나타나는 것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이고,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것은 진(秦), 한(漢)대에 이르러서이다.

한국의 철기는 중국 전국시대 철기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조쇠도끼(鑄造鐵斧)를 위시하여 농공구류가 우세한 양상을 띠고 있다. 철기의 자체적인 생산은 B.C. 2세기경으로 보여지는데, 이 때부터 단조철기도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철기생산의 본격화 및 현지화, 제조기술의 발전은 다른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쳐 새로운 토기의 출현, 생산력의 증대와 같은 결과를 낳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통합이 가속화되어 최초의 국가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한국고고학에서는 철기시대를 대신하여 B.C. 300년에서 기원전후 시기까지를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 기원전후로부터 300년까지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부르고 있는데 이를 합쳐 철기시대(鐵器時代)로 하자는 주장도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B.C. 1000년기 전반부터 고조선(古朝鮮)으로 보고 있어 철기문화도 고조선의 문화로 파악되고 있다.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은 북부지역, 중부지역, 그리고 남부지역 등이 다소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북부지역에서 가장 먼저 알려진 철기시대 유적은 평북 위원 용연리(龍淵里)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다량의 명도전(明刀錢)과 쇠도끼(鐵斧), 쇠낫(鐵鎌) 등 공구류와 농기구류가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명도전이 출토된 유적으로는 청천강 이북지역에서 15개소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연(燕)의 화폐로 승석문토기(繩蓆文土器)와 함께 분포되고 있어 철기문화가 처음 유입되는 과정을 보여주게 되었고 철기문화의 유입 연대를 B.C. 4~3세기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평북 영변 세죽리 유적은 신석기시대층, 청동기시대층, 철기시대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기시대층은 가장 윗층으로 집자리는 모두 지상가옥이다. 집자리에서 명도전(明刀錢), 포전(布錢) 등의 중국화폐와 승석문토기 및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무덤으로는 움무덤, 조개무덤, 독널무덤 등이 있다. 유물로는 철기, 청동기, 토기 등이 있는데, 철기에는 호미, 괭이, 삽, 낫, 반달칼, 도끼, 자귀 등이 있다. 토기는 회색의 승석문토기가 출토되고 있으며, 그 연대는 B.C. 3~A.D. 3세기로 보고 있다.

함북 회령 오동 유적에서는 6호 집자리에서 주조쇠도끼가 출토되었는데, 북한학자들은 B.C. 6~4세기경으로 편년하고 있다. 무산 호곡동 유적에서도 철기시대의 집자리들이 조사되었는데, 전체를 6기로 나누었으며, 이중 5기와 6기에 속하는 집자리가 다수의 철기를 포함한 철기시대 집자리임이 밝혀졌고, 5기를 B.C. 7~5세기로, 6기를 B.C. 3세기로 편년하고 있다. 그러나 5기에 속하는 집자리에서 주조쇠도끼가 출토되고 있어 이를 B.C. 3세기경으로 낮추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북부지역의 철기문화는 세형동검(細形銅劍)이나 움무덤(土壙墓)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움무덤은 북한에서 움무덤(土壙木棺墓), 나무덧널무덤(土壙木槨墓) 및 귀틀무덤(大形木室墳)으로 구분하고 있다. 움무덤의 기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단장(單葬)의 덧널무덤(木槨墓)은 은대(殷代)부터 동주시대(東周時代)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움무덤이 북방계 청동기문화권에 들어와 처음 축조된 것이 요령성(遼寧省) 금서현(錦西縣) 오금당(烏金塘) 움무덤이다. 여기에서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진과(秦戈)가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시기를 춘추시대 전기로 보고 있다. 그 다음의 덧널무덤은 심양(瀋陽, 現 沈陽)의 정가와자(鄭家窪子) 유적인데, 여기에서는 인골과 함께 많은 양의 청동기와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춘추말(春秋末)~전국초(戰國初)인 B.C. 6~5세기로 보고 있다.

대동강 유역에서 가장 이른 움무덤 유적은 재령군 고산리 유적을 들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변형 비파형동검과 도씨검(桃氏劍) 2자루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전국말(戰國末)인 B.C. 4~3세기로 보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강서 태성리 유적이 있는데, 이 곳 덧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윤무병 Ⅱ식에 속함)과 동투겁창(銅矛), 쇠도끼, 철단검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B.C. 2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북한에서 움무덤은 B.C. 5세기에서 2세기 중엽으로, 나무덧널무덤은 B.C. 2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움무덤은 세형동검이 유행하던 시기에 서북한지역으로 전래되었으며, 뒤이어 철기가 혼입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유물로는 세형동검·세문경(細文鏡)·동투겁창 등의 청동기, 철단검·철제농공구·쇠뇌 등의 철기,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배부른단지 등의 토기류가 있다.

그밖에 철기시대 초기의 유적으로서 청동기와 철기가 공반되는 유적으로는 서흥 천곡리 돌널무덤(石棺墓), 황해도 송산 솔뫼골 위석묘(圍石墓), 함흥시 이화동 움무덤 등이 있다. 다만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인 서흥 천곡리 돌널무덤의 경우, 무덤에서 출토된 검파두식(劍把頭飾)을 철광석제로 보고 있어 철기시대의 유적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본다.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에서 변화된 것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세형동검에 대한 정의는 다소 다르다. 종래 세형동검은 청천강 이남지방에서만 발견되는 신부 중앙에 결입부(抉入部)가 있는 전형적인 동검을 지칭하였고, 남한학자들은 신부의 폭이 좁아지는 변형의 비파형동검까지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동검은 요령지방을 비롯하여 만주지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데, 출현시기는 대체로 B.C. 5~4세기로 보고 있으나 세형동검이 대동강유역에 출현하는 것은 대체로 B.C. 4~3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이상과 같이 북부지역에서 철기문화의 시작은 움무덤의 유입 및 세형동검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대체로 세형동검이 만들어진 이후 움무덤이 유입되면서 철기가 등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철기시대의 개시 연대는 북한학자들이 B.C. 7세기경까지 올려보고 있으나 이는 연대추정의 근거가 불확실한 것이고, 대체로 B.C. 4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처음 철기가 유입되는 시기에는 승석문등 타날문이 있는 토기에 앞서서 서북지역에서는 미송리식토기, 묵방리식토기, 쇠뿔모양손잡이토기 등이, 동북지역에서는 꼭지손잡이토기, 쇠뿔모양손잡이토기 및 검은간토기 등 무문토기 계통토기가 사용되었다.

중부지역 철기문화에 대한 관심은 가평 마장리 유적에서 출발한다. 미군장교에 의해 조사된 이 유적은 그 후 김원용에 의해 국내에서 소개되었으며, 출토유물에 대한 자세한 보고는 한영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유적은 B.C. 2세기경부터 기원전후에 걸친 유적으로 보았는데 여기에서 나온 방사성탄소연대는 1700±250 B.P.(200년)가 나왔다.

이후에 조사된 유적은 당시 가평 이곡리 유적중도 유적이 있다. 중도 유적에서는 집자리와 돌무지무덤 등이 조사되었는데, 1·2호 주거지의 연대를 북창 대평리 유적과 비교하여 1~2세기경으로 보았지만, 2호 주거지에서 채집된 방사성탄소연대는 1534±95 B.P.(415년)가 나와 추정연대와 상당한 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평 이곡리 유적은 철기 Ⅰ기와 Ⅱ기로 구분하였고, 그 연대는 중도 유적의 연대를 받아들여 1~2세기경으로 보았다.

이외에도 조사된 유적으로는 경기도 수원 서둔동 유적, 횡성 둔내 유적, 양양 가평리 유적, 충청북도 중원 지동 유적 및 하천리 유적 등이 있다. 그리고 명주 안인리 유적에서는 여자형(呂字形) 주거지와 철자형(凸字形) 주거지가 발견되었고,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회색토기 등의 토기류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집자리 유적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공반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나 아직까지 청동기시대를 잇는 철기시대 초기유적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다.

이 시기의 무덤에는 움무덤, 독널무덤(甕棺墓), 돌무지무덤(積石塚) 및 즙석분(葺石墳) 등이 있다. 움무덤은 가락동 유적에서 처음 알려졌다. 가락동 유적은 1호분이 널무덤이고, 2호분은 즙석봉토분인데 널무덤과 독널무덤이 합장된 형식이다. 이 즙석봉토분은 한강유역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되는 형식이다. 석촌동 3호분 동쪽에서도 즙석봉토분, 움무덤, 독널무덤 등 여러 기가 조사되었으나, 그 연대를 모두 3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다. 최근에 조사된 진천 송두리 유적은 2기의 덧널무덤에서 중부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남부지역에서 보이는 소위 ‘와질토기’ 계통의 쌍이부원저호(雙耳附圓底壺) 및 주머니호 등이 쇠도끼, 쇠낫, 청동기 등과 함께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천안 청당동 유적에서는 다수의 널무덤이 조사되었는데, 연질항아리와 깊은바리모양(深鉢形)토기, 청동제 마형대구(馬形帶鉤)와 함께 출토되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와질계토기는 낙동강 유역과는 다르게 와질계토기의 중심지인 낙동강유역에서부터 파급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독널무덤은 가락동 2호분과 같이 움무덤과 합장으로 발견되거나 단독묘일 경우에도 돌무지무덤과 같은 다른 묘제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연대도 3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돌무지무덤은 양평 문호리, 춘천 중도, 제원 양평리, 제원 도화리 등 한강 상·중류에서 2~3세기경에 해당되는 무기단식 돌무지무덤이 발견되는데, 4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울 석촌동 부근에서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발전된다.

이와 같이 중부지역에서는 청동기문화 후기와 직접 연결되는 유적이나 서북지역의 대동강유역과 낙동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초기 움무덤 유적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모든 묘제가 2세기 내지는 3세기경 이후로 편년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자료로써는 중부지역에서 철기문화의 형성과정을 구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중부지역에서는 남부지역과는 달리 단면원형의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 등 후기 무문토기를 계승하는 토기로 단면삼각형의 점토띠토기의 존재가 극히 적은데 비해서 중도식토기를 비롯한 경질무문토기가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즉 하천리 2호 주거지에서는 경질무문토기만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를 한강유역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로 보고 있다. 또한 명주 안인리 유적에서도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주거지에서 경질무문토기가 많고 타날문토기는 적게 나타나는 경향이 보이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중부지역에서 철기시대 초기에는 경질무문토기만이 사용되었던 시기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는 대체로 4기로 구분된다. Ⅰ기는 청동기사회에 철기유물이 유입되는 단계로 그 연대는 B.C. 2세기경이다. Ⅱ기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나 여전히 청동기나 경질무문토기가 사용되며, 무덤에는 널무덤과 독널무덤이 있던 시기로 그 연대는 B.C. 2세기 말 내지 1세기 초반에서 전반까지로 설정된다. Ⅲ기는 완전히 철기문화에 접어든 단계로 타날문토기, 회백색연질토기(瓦質土器)가 사용되며, 철기류와 장신구류가 많아지며 무덤에는 널무덤이 여전히 사용된다. 이 시기의 연대는 1세기 중엽에서 2세기 전반까지로 설정된다. Ⅳ기는 철기문화가 발달하는 단계로 덧널무덤이 등장하고, 철기의 출토량이 많아진다. 널무덤에서는 무기류가 증가하며, 패총에서는 회청색 경질토기가 등장한다. 이 시기는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중엽까지로 설정 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3세기 후반경 이후로 고총고분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남부지역 철기문화의 형성과정은 전 지역이 동일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보기 보다는 최소한 두 계열에 의해 유입된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그 과정 속에서 남부지역 내에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움무덤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는 대동강 유역으로부터 육로를 이용하여 낙동강유역으로 파급된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움무덤에서 철기와 함께 중국의 전한대(前漢代)에 제작된 일광경(日光鏡), 소명경(昭明鏡)과 같은 거울 등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개무지 및 독널무덤의 문화는 해로를 통해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동남부지역으로 파급된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것은 패총에서 화천(貨泉), 오수전(五銖錢) 등 중국의 화폐와 복골(卜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계열의 문화는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두 문화가 접합되는 낙동강 하류역에서는 두 계열이 어느 정도 공존하였음이 유적에서 나타나고 있다.

남부지방 철기문화의 초기 단계에서의 성격문제는 낙랑(樂浪)의 등장과 관련시키는 것이 통설이나 오히려 그보다는 이전의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건국을 전후하는 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온 철기문화의 여파가 남부지역까지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남한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의 철기로 주조쇠도끼(鑄造鐵斧)등이 있는데, 이들은 낙랑과 직접 관련되는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철기문화의 형성이 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철기문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각에서 벗어나 남부지역의 철기문화가 밖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문화와 기존의 토착문화가 융합되어 새롭게 생성되었다는 관점의 접근도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고고학적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즉 철기가 유입되는 시기에도 여전히 석기나 청동기가 사용되었다는 점, 청동기가 소멸한 이후에도 무문토기 계열인 경질무문토기와 적갈색 연질토기가 계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과 특히 철기 중에서 초기에는 청동기를 모방한 유물이 많다는 점 등이다. 다만 철기의 제작기술은 외부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는 외래적인 문화요소가 많다고 하더라도 토착적인 청동기문화에 이어 변화·발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시대는 역사적으로 북부지역에서는 고조선(古朝鮮)과 위만조선에 이어 고구려(高句麗)가 등장하는 시기이고, 남부지역에서는 삼한(三韓)이 자리잡았던 시기로 서울지역과 경주지역에서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독자적인 중심세력이 형성되면서 백제(百濟), 신라(新羅) 및 가야(伽耶) 등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참고문헌

  • 韓國考古學에 있어서 時代區分論(崔盛洛, 亞細亞古文化, 黃龍燻博士停年退任紀念論叢, 1995년)
  • 韓國 鐵器時代의 時代區分(崔夢龍, 國史館論叢 50, 1993년)
  • 韓國의 先·原史土器(國立中央博物館, 1993년)
  • 韓國 原三國文化의 硏究(崔盛洛, 學硏文化社, 1993년)
  • 韓國考古學槪說(金元龍, 一志社, 1986년)
  • 조선고고학개요(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