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문화

청동기문화

[ 靑銅器文化 ]

청동기시대에는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농경과 목축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생산력이 증가하고 이를 토대로 정주성 대규모 마을이 형성되며, 사회 내적으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에 신분적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무덤은 고인돌〔支石墓〕, 돌널무덤〔石棺墓〕, 독널무덤〔甕棺墓〕 등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 등장하여 마을 내부의 일정한 지역에 묘역(墓域)을 형성하였다. 광석에서 구리〔銅〕를 추출하여 주석〔錫〕, 아연(亞鉛), 납〔鉛〕 등의 다른 금속과 배합한 청동기 주조 기술이 보급되며, 용도에 따라 전문화된 간석기〔磨製石器〕와 함께 다양한 기종과 크기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제작, 사용되었다.

한국에서의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는 한국 청동기시대에 대한 개념 규정이 일치하지 않아 뚜렷한 기준이 없지만, 최근 민무늬토기 출토 유적의 탄소연대측정치에 따라 기원전 1300년대까지 소급되고 있으며, 세형동검(細形銅劍)과 함께 철기가 공반되는 기원전 3∼2세기까지를 하한으로 삼고 있다. 그 지역적 범위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문화의 분포 범위를 고조선(古朝鮮)을 포함한 예맥족(穢貊族)의 활동 무대로 인정하여 리야오허(遼河)-쏭후아지앙(松花江)-한반도 전 지역을 포함한다. 청동기문화는 청동제 단검과 그 공반 유물에 따라 시기가 세분되는데, 비파형동검 이전 단계를 전기, 비파형동검 문화기를 중기, 그리고 세형동검 문화기를 후기로 편년하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에서 농경의 역사는 신석기시대 후기까지 소급할 수 있으나,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농경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잡곡(雜穀)이 재배되었으나, 청동기시대에 잡곡과 함께 벼농사〔稻作農耕〕가 성행하게 되었다. 보리, 밀, 조, 피, 수수, 콩, 팥, 기장 등의 잡곡류가 청동기시대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었으며, 이와 아울러 대동강유역의 평양 호남리(남경) 유적, 한강유역의 여주 흔암리 유적, 금강유역의 부여 송국리 유적의 집자리에서 탄화미(炭化米)가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초기 농경은 유적의 입지 조건으로 보았을 때, 밭농사가 중심이고, 중기 이후에 가서야 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울산 야음동과 무거동(옥현) 유적에서 전기의 논 유적이 조사되었다고 하지만,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탄소연대측정치는 중기에 보다 가깝다. 이외에도 울산 무거동, 밀양 금천리, 논산 마전리, 부여 구봉리 유적 등 주로 남부지방에서 논유적이 확인되고 있지만, 최근 춘천 천전리 유적에서도 논유적이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논의 형태는 구릉 사면의 말단부를 개간한 소구획(小區劃) 논과 계단식(階段式) 논이 모두 있다.

밭유적은 대구 동천동, 동호동, 진주 대평리, 진안 모정리(여의곡) 유적 등지에서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진주 대평리 유적은 반원형으로 곡류하면서 흐르는 남강의 자연제방에 주거 구역이 위치하고 있고 그 배후사면에 대규모 밭이 형성되어 있다. 청동기시대 밭은 3개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같은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밭작물이 경작된 것으로 보이며, 13,000여 평의 밭이 조사되었다. 이 중에 어은 1지구의 밭은 4,000여 평의 규모인데, 특별히 구획의 흔적이 없어 집단적인 노동력에 의해 공동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에서 경작된 곡물에는 쌀, 밀, 보리, 기장, 조, 콩, 들깨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의 농경구는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 석기이나, 목제 가공용의 홈자귀〔有溝石斧〕와 대팻날도끼〔扁平偏刃石斧〕, 돌끌〔石鑿〕 등의 석기가 많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본래 상당히 많은 목기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경구의 종류는 날부분을 조갯날〔蛤刃〕처럼 가공한 대형의 간도끼〔磨製石斧〕를 삼림 벌채용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곰배괭이, 돌보습, 매부리형석기 등은 농경지 개간에 필요한 굴경구(堀耕具)로 사용하였다. 수확용 농경구는 돌칼〔石刀〕과 돌낫〔石鎌〕이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농경, 목축 등 생업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구릉 정상부와 하천의 자연제방에 국한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지만, 농경이 생업경제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면서 점차로 저구릉 사면과 선상지로 마을이 확대되어 갔다. 또한 초기의 마을은 2∼4기의 집자리〔住居址〕가 한 단위가 되어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마을이 저구릉 내지 강변의 충적대지로 옮겨가면서 그 규모가 확대되어 많게는 수백여 기의 집자리가 한 단위를 이루는 대규모 마을로 변모해 갔다.

청동기시대 마을의 모습은 오늘날과 같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경관을 보여주는데, 대구 동천동 유적과 진주 대평리 유적과 같이 주거 구역-매장 구역-경작지 순으로 공간 배치에 있어 정형성이 관찰되며, 주거 구역의 배후산지가 수렵 공간으로, 그리고 경작지에 인접한 하천이 어로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마을 경관이 정착된 것은 청동기시대 중기 무렵이며,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정주성(定住性)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청동기시대 마을을 이루는 최소 단위는 10기 내외의 집자리로 구성된 마을이지만, 이를 기반으로 중, 대형의 마을이 생겨났으며, 반대로 가경지(可耕地)와 용수(用水)가 부족하면 분촌(分村)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중기 이후의 마을은 독립적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위계화(位階化)된 여러 단계의 마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는 이웃한 여러 주거군이 일련의 옥 제작 공정에 분업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지역과 지역은 교환 체계를 가지고 연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천하석제(天河石製) 옥(玉) 제작과 관련된 산청 묵곡리, 진주 대평리 유적과 함께 서남해안의 옥기가 껴묻기〔副葬〕된 고인돌 유적은 동일한 유통망 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마을에서 발견된 집자리 대부분은 반움집〔半竪穴住居址〕으로 평면 형태에 따라 방형계와 원형계로 구분된다. 방형계 집자리는 한반도에서 이른 시기에 등장하여 청동기시대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되지만, 지역과 시기에 따라 장단비(長短比) 차이가 있다. 중부지방의 서울 역삼동, 하남 미사리, 천안 백석동, 보령 관산리 유적에서는 세장방형의 집자리가 조사되었는데, 여기에는 혈연관계가 있는 여러 세대의 구성원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가옥을 세장방형 형태로 지은 것은 아니고 가족 구성원이 증가함에 따라 장방형의 가옥에서 세장방형으로 증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는 달리 남부지방에서는 중기로 가면서 점차로 집자리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확대가족이 분화하여 혼인한 부부와 그 자녀들로 구성된 동일 세대의 가족이 한 가옥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였음을 보여준다.

청동기시대의 원형계 집자리는 송국리형(松菊里型)이 유일한데, 집자리 내부 중앙에 타원형구덩이〔娥圓形竪穴〕와 함께 기둥구멍〔柱穴〕이 배치된 집자리를 말한다.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충청, 전라, 경남지역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제주도와 일본 큐슈(九州)지방에서도 확인된다. 집자리 내부에 배치된 타원형구덩이의 기본적인 기능은 석기 내지 옥기 제작을 위한 공간이었으나 최초의 설치 목적과는 다르게 지역에 따라 다양한 기능으로 변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방형계 집자리와는 달리 집자리 내부에 화덕자리〔爐址〕가 없기 때문에 공동으로 야외 취사를 했다는 견해도 있다.

청동기시대 집자리 내부에서 조사된 화덕 시설은 무시설식(無施設式) 또는 구덩식〔土壙式〕이라 불리는 화덕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른 단계에는 돌을 돌린 돌두름식〔圍石式〕 화덕도 사용되었다. 돌두름식 화덕은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었지만, 청동기시대의 것은 평면 형태가 방형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미송리형토기(美松里型土器) 출토 지역의 집자리와 금강유역의 가락동유형(可樂洞類型) 집자리에서 주로 확인된다. 돌두름식 화덕이지만 바닥에 판돌을 깔은 돌바닥돌두름식〔石床圍石式〕 화덕 역시 이른 시기에 사용되는데, 압록강 지류인 독로강유역의 공귀리와 심귀리 유적, 그리고 남한지방의 새김덧띠무늬토기〔刻目突帶文土器〕가 출토된 미사리유형(渼沙里類型)의 집자리에서 발견된다.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에는 개별 가옥마다 내부에 저장구덩이〔貯藏孔〕를 설치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가락동유형과 흔암리유형(欣岩里類型)의 집자리에서는 출입구 우측에 저장구덩이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중기에 이르면 가옥 외부에 저장구덩이를 설치하는 변화를 보여주는데, 수확물을 공동으로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기 이후의 마을에서 굴립주건물(掘立柱建物)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중부지방에서는 하남 미사리, 춘천 천전리 유적을 비롯하여 남부지방의 영암 장천리, 산청 묵곡리, 진주 대평리 옥방, 창원 서상동(남산), 사천 이금동 유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일부 유적을 제외하면 굴립주건물의 기능이 대부분 창고로 파악되고 있어 청동기시대 중기 이후 식량의 잉여 생산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마을이 점차 증가하면서 가경지와 용수를 둘러싼 집단간의 싸움이 빈번해졌다. 집자리의 화재율은 중기에 이르면 전 시기에 비해 10% 가량 증가하게 되는데, 특히 북한 지역의 경우 청동기가 가장 밀집 분포되어 있는 대동강 유역에서의 화재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마을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은 환호(環濠)와 목책(木柵)이 있으며, 창원 서상동 남산 유적에서와 같이 굴립주건물이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望樓)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방어와 관련된 시설로서의 환호는 늦어도 중기 전반에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청원 대율리 유적과 같이 그 이전에 이미 구획의 의미를 가진 환호가 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 중기 환호 마을은 울산 검단리, 천상리, 부여 송국리, 창원 서상동, 진주 대평리 옥방, 대구 동천동, 산청 사월리 유적 등 남부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나, 청동기시대 후기 단계의 환호 마을은 강릉 방동리, 화성 동학산 유적 등 중부지방에서도 발견된다. 위계가 높은 마을은 다중(多重) 환호 시설을 설치한 경우도 있는데, 진주 대평리 옥방 유적에서만 2개의 다중 환호 마을이 조사되었다. 목책은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방어 시설물 내지 구획 시설의 일종으로 환호와 함께 청동기시대 중기 이후의 유적에서 주로 발견된다. 부여 송국리 유적과 같이 목책만으로 방어 시설을 한 경우도 있지만, 진주 대평리 옥방 1지구에서는 환호와 목책이 함께 방어를 담당하였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덧띠토기〔粘土帶土器〕 단계에 이르면 집단 간의 갈등이 보다 심화되어 보령 교성리, 화성 동학산 유적과 같이 산 정상에 위치한 소규모 마을유적이 확인된다.

청동기시대에는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고인돌〔支石墓〕을 비롯하여 돌널무덤, 독널무덤, 움무덤〔土壙墓〕 등의 새로운 무덤이 만들어진다. 이들 무덤들은 분포와 출현 시기에 차이가 있지만, 그 매장 전통은 초기철기시대까지 지속된다. 청동기시대 초기에 등장하는 무덤은 생활공간과 분리되어 일정한 묘역을 갖추기보다는 생활공간 내에 분산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마을 구조가 정형화되면서 점차 주거구역과 경작지 사이에 묘역을 조성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초기철기시대 이후로는 마을 외곽에 묘역을 조성하였다. 또한 청동기 사회의 복합도가 증가하면서 동일 무덤군 내에 개별 무덤 간에 위계 차이가 뚜렷해지고, 부여 송국리 유적 무덤군과 인근의 남산리 유적 무덤군처럼 무덤군 간의 위계 차이도 두드러진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은 고인돌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알려진 고인돌 수는 4만여 기 이상인데, 이 가운데 북한의 대동강유역과 전북 고창을 포함한 전남지역에 주로 밀집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은 구대륙을 중심으로 분포 범위가 넓지만,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의 고인돌은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고인돌은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의 위치와 무덤 형태에 따라 크게 북방식(北方式)과 남방식(南方式)으로 구분되며, 남방식은 다시 고임돌〔支石〕의 유무에 따라 바둑판식〔碁盤式〕과 뚜껑식〔蓋石式〕으로 세분된다.

북방식 고인돌은 리야오도옹(遼東)지방과 한반도 서북부, 특히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분포하나, 드물게 고창, 해남 등 남부지방에도 분포하며, 남방식 고인돌은 한반도 남부에 분포 범위를 두고 있다. 한편, 고인돌 가운데에는 묘역시설(墓域施設)이 부가된 경우가 있는데, 침촌리형(沈村里型)과 같이 군집묘로서 하나의 묘역 시설 내부에 여러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가 있는 반면에 한반도 남부의 금강, 황강, 남강유역에서는 개별 무덤에 묘역 시설이 부가된 ‘용담식 고인돌’ 또는 ‘구획묘(區劃墓)’라 불리는 무덤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무덤들은 단독으로 묘역시설을 갖춘 것도 있지만, 위계가 낮은 무덤들은 군집화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대구 이천동(대봉동) 고인돌 유적과 같이 돌널 또는 돌덧널〔石槨〕 무덤군 지표상에 개별적인 무덤과는 관련 없이 거대한 돌을 배치하여 전체 무덤군의 묘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는 묘표식(墓標式) 고인돌이 있다.

돌널무덤은 북한에서는 돌상자무덤〔石箱式石棺墓〕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제1기인 안드로노보기(Andronovo期)에 처음 등장하여 네이머엉구(內蒙古), 리야오닝(遼寧)지방을 경유하여 한반도 서부 지방 전역에 확산된 무덤 양식이다. 고인돌과 같이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에 등장하며, 청동기시대 후기에 이르러 돌덧널무덤〔石槨墓〕으로 발전한다. 벽석을 1매의 판돌〔板石〕로 만든 경우도 있지만, 송국리 유적의 돌널무덤과 같이 여러 매의 판돌을 세워서 조립한 경우도 있다. 돌널무덤만으로 무덤군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고인돌 주변에서 크기가 작은 돌널무덤이 발견되는 경우도 많아 고인돌보다 위계가 낮은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기로 편년되는 송국리 문화권에서는 독널무덤이 유아용으로 사용되었다. 송국리식토기와 같은 일상용기 바닥에 구멍을 뚫고 아가리를 판돌로 덮은 외독널〔單甕棺〕이 사용되었는데, 묘역의 주변부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거창 대야리 유적과 같이 생활공간 내부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 외에도 독무덤과 함께 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이 송국리문화권에서 발견되는데, 무덤구덩〔墓壙〕이 1단인 것과 2단인 것으로 구분된다.

본격적인 농경 사회가 정착되고 마을을 단위로 한 공동체 의식이 증가하면서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가 다양해지고 구체화되었다. 특히 농경의례(農耕儀禮)는 파종기와 수확기에 농경에서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로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농경무늬청동기〔農耕文靑銅器〕가 그 의기(儀器)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진주 대평리 유적의 밭에서는 이형의 토제품과 석제품을 모아놓은 집석유구(集石遺構)가 조사되었는데, 농경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장송의례(葬送儀禮)는 구석기시대 이래로 가장 오랜 기간동안 지속된 의례 가운데 하나로 무덤을 만들고 여기에 주검을 안치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대개 무덤 주변에서 출토된 상당히 많은 양의 깨진 석기편, 토기편, 옥기 등이 장송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지하의 매장주체부가 없는 거대한 덮개돌〔上石〕을 제단(祭壇)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또한 마산 가포동 유적과 같이 바위 틈 사이에 청동기를 매납(埋納)한 퇴장유적(退藏遺蹟)은 집단의 최고지배자에 의한 제의의 일종으로 파악되며, 고령 양전리, 울산 천전리, 반구대 유적 등 영남지방에 집중되어 있는 바위그림〔岩刻畵〕 유적은 특수한 형태의 제사터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송만영)

참고문헌

  • 청동기·철기시대의 사회와 문화(이청규, 한국사 1, 한길사, 1994년)
  • 한국 농경문화의 형성(한국고고학회,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