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무늬토기

민무늬토기

깊은바리모양토기(김천송죽리 19호 집자리 출토)

깊은바리모양토기(김천송죽리 19호 집자리 출토)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또는 유문토기(有文土器)에 대한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총칭하는 것이지만, 주로 협의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동시기의 간토기〔磨硏土器〕를 제외한 것이다. 거친 바탕흙〔胎土〕으로 제작되었으며 물 손질기법으로 정면된 조질토기(粗質土器)로서 대략 800℃ 이내의 낮은 온도에서 소성된 적·황·갈색계의 토기를 한정한다.

민무늬토기의 기종은 주로 기형에 따라 크게 깊은바리〔深鉢〕·얕은바리〔淺鉢〕·독〔甕〕·항아리〔壺〕·굽달린바리〔臺附鉢〕·굽잔〔高杯〕·뚜껑〔蓋〕 등으로 분류된다.

얕은바리모양토기(김천송죽리 19호 집자리 출토)

얕은바리모양토기(김천송죽리 19호 집자리 출토)

바리는 최대경이 구연에 있으며 동체부에서 꺾임이 없이 곧장 구연으로 연결되는 것인데, 대체로 구경보다 기고가 큰 쪽을 깊은바리로, 기고가 낮은 쪽을 얕은바리로 나눈다. 항아리는 동체부가 점차 좁아져 목이 부착된 것을 지칭한다. 이에 반하여 독은 최대경이 동체부 중위에 있으면서 목이 없는 것이다. 즉 구연이 동체부와 곡절없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나, 구연이 동체부에서 곡절하더라도 팽이모양토기〔角形土器〕·덧띠토기〔粘土帶土器〕처럼 구연이 동체부에 붙은 형태를 말한다.

굽달린바리는 바리에 속이 빈 대각이 부착된 것이다. 굽잔은 매우 얕은바리에 원통형 또는 나팔상의 높은 대각이 부착된 것인데, 한반도에서는 후기에 보편화하는 기종이지만, 전·중기의 유적에서는 예외적인 기종이다. 이 시기 중국의 동북지방에서는 찾을 수 있으며, 북한지역의 굽잔도 다분히 중국계의 유입품일 가능성이 높고, 남한지역의 보고에서 굽잔 또는 굽다리접시모양토기〔豆形土器〕라는 예가 있지만 모두 붉은간토기굽달린작은항아리〔丹塗磨硏土器臺附小壺〕로 판단되는 것이다. 뚜껑은 남한지역에서는 후기가 되어서야 일상화하는 것이지만, 중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전주 여의동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빠른 것으로서 낮은 삿갓모양이다.

이러한 기종의 분류는 반드시 형태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구연이 내만하는 깊은바리의 경우는 기형 분류에 따른다면 독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것이 시간에 따라 구연이 직립에서 내경하는 쪽으로의 변천이라고 한다면 비록 독모양이라도 깊은바리로 분류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분류와 형태적 분류에 따라 그 분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각 기종에 따른 기능은 항아리가 저장기(貯藏器), 독과 깊은바리가 자비기(煮沸器), 얕은바리가 식기(食器)로 보통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시기에 따라 혹은 크기에 따라 기능은 변동할 수 있다.

독모양토기(논산 마전리 출토)

독모양토기(논산 마전리 출토)

한반도에서 각 지역의 지역색에 따라 분류되는 민무늬토기 기종의 구성비는 압록강유역이 깊은바리, 대동강유역이 독, 두만강유역이 항아리 중심의 특징을 가진다. 남한지역은 깊은바리 중심이지만, 중기 후반이 되면 항아리 중심이다가 후기에는 독 중심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남한지역 내에서도 동남지역은 중기 후반이 되어도 다소 깊은바리가 우세한 경향이 있다고도 생각된다.

이렇게 각 지역에서 기종구성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생활양식의 차이를 시사하는 것이지만, 문화의 계통적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된다. 또는 지역의 재지적(在地的) 신석기문화와 새로운 청동기문화와의 접변(接變)에서 나타난 각 지역의 특성이라고도 생각된다.

항아리모양토기(경주 황성동 다-13호 집자리 출토), 굽달린작은항아리토기(충주 조동리 출토)

항아리모양토기(경주 황성동 다-13호 집자리 출토), 굽달린작은항아리토기(충주 조동리 출토)

민무늬토기의 성형(成形)은 점토띠를 바깥쪽에 덧붙여 쌓아 가는 외경접합(外傾接合)과 안쪽으로 쌓는 내경접합(內傾接合)으로 나눈다. 또 점토띠의 형태에 따라 판상의 점토띠를 고리모양으로 한단 두단 쌓아올리는 적륜법(輪積法)과 점토띠를 코일모양으로 쌓아올리는 권상법(捲上法), 손으로 점토띠를 오목하게 눌러 성형하는 수날법(手捏法)이 있다. 대부분의 민무늬토기는 외경접합의 윤적법으로 성형되지만, 조기로 편년되는 덧띠무늬토기〔突帶文土器〕에서는 내경접합기법을 찾아볼 수 있고 점토띠의 폭이 좁은 특징이 있다.

기종에 따라 윤적의 점토띠 폭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윤적하는 점토띠의 단수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소형이나 명기(明器)의 기능을 가지는 민무늬토기는 권상법이나 수날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민무늬토기의 저부에는 가끔 잎이 큰 나뭇잎이나 볍씨와 같은 곡물의 흔적이 찍힌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 회전축이 없는 제작대 위에 다 자란 나뭇잎을 깔고 그 위에서 토기를 제작하였으며, 이것을 통하여 곡물의 수확기인 가을철에 만든 것이라고도 추정한다.

정면기법(整面技法)은 가죽이나 천으로써 토기 표면을 고르게 정리한 물손질기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며, 이 외에 마연·목리조정(木理調整)·목판누르기·두드림〔打捺〕·깎기·긁기 등의 기법도 사용된다. 마연기법은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갈색간토기〔褐色磨硏土器〕·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에서 관찰되듯이 매끄러운 도구로써 문질러 그릇 표면에 광택을 낸 것이며, 민무늬토기에서는 극히 부분적으로만 사용된다. 목리조정은 나무판으로 긁어 생기는 나이테의 요철흔(凹凸痕)을 말하는데, 전기와 중기의 토기에서 관찰되는 목리흔은 긁힌 침선의 간격이 넓은 특징을 보이다가, 후기 전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목판누르기는 나무판으로써 토기의 표면을 누른 것인데, 일종의 두드림 기법으로도 볼 수 있지만, 연속적으로 두드린 것은 아니다. 이 기법은 전기 후반부터 중기와 후기까지 극히 일부 토기에서 관찰된다.

두드림은 나무판에 노끈을 감거나 음각으로 선을 새긴 두들개〔拍子〕로 토기 표면을 두드린 기법으로, 민무늬토기에서는 중서부지역의 중기와 후기 전반에 한정되어 나타난다. 현재 알려진 중서부지역의 중기에 해당하는 여러 유적에서는 노끈을 감은 것, 후기의 보령 교성리 유적에서는 목판을 새긴 것이 알려져 있다. 깎기는 주로 기벽이 두터운 곳을 얇게 하기 위해서 예새와 같은 도구로 점토를 깎아내는 기법이다. 저부의 밑바닥을 깎아 올림바닥을 만드는데 주로 이용된다. 긁기는 토기 성형시에 생긴 기면의 요철면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딱딱한 도구로써 긁는 기법이다. 토기의 내면에서 주로 관찰된다. 물 손질과 마연은 토기의 표면을 마무리한 기법이며, 그 외의 기법은 기벽을 고르게 하기 위한 정면기법이다. 다만 깎기의 경우는 때때로 성형기법의 역할도 한다.

민무늬토기의 색조는 다양하지만 모두 적·황·갈색계로서 산화염(酸化焰)에서 소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적·황색계의 토기는 충분한 공기를 이용한 산화염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것을 말하며, 갈색토기는 다소 탄소가 기면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완성되었다는 점을 말한다. 간혹 흑색의 반점이 있는 것은 숯덩이가 표면에 붙어 있었거나 토기와 토기가 서로 붙어 있어서, 탄소의 공급으로 소성된 토기가 불완전 연소된 까닭이다. 신석기시대의 토기가 대체로 민무늬토기보다 어두운 갈색조가 강한 점은 바탕흙의 차이도 있겠지만, 소성방법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민무늬토기의 소성은 한데가마〔露天窯〕에서 이루어지는데, 얕은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땔감을 쌓고 건조된 토기를 올려 소성한다. 이러던 것이 중기가 되면 밀폐식 가마가 나타난다.

진주 남강댐수몰지구에서도 1례가 알려져 있지만, 중서부지역의 해안부 송국리문화(松菊里文化) 유적에서 빈번히 출토되고 있다. 이 밀폐식 가마는 평면 형태가 원형 또는 도랑형태〔溝狀〕인 구덩이를 만들고, 그 내부에 땔감과 토기를 쌓고 그 상부를 초본류를 썰어 넣은 점토로써 지붕처럼 덮어씌운 구조라고 추정된다. 비록 밀폐식 구조라고는 하나 이 시기 송국리식토기의 색조가 적·황색계인 점으로 본다면 공기의 흡입과 배출이 원활한 구조로서 산화염소성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가마는 두드림기법이 채용된 중서부해안지역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직 북한지역에서 두드림 기법과 밀폐식토기 가마의 출토례가 없기 때문에 중서부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의 교류가 중기에도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토기의 전면이 흑·회색계인 토기는 남한지역의 후기에 제작되지만, 북한지역에서는 미송리식토기(美松里式土器)나 간토기에서도 간혹 발견된다. 이러한 토기는 한데가마에서 토기 소성의 완성시기에 가열을 중단한 채로 유기물이나 재를 덮어씌워 탄소를 토기 표면에 흡착시켜 완성하거나, 밀폐된 가마 내부를 탄소가 많은 환원염상태로 만든 뒤 모든 공기의 출입구를 봉하여 소성을 완료함으로써도 제작이 가능하다. 따라서 흑색토기가 제작되었다면, 밀폐가마의 존재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토기 표면의 색조는 토기 소성의 완성 시점의 소성분위기를 말한다면, 토기 속심의 색조는 토기 소성의 중간단계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토기관찰을 통하여 가마의 구조가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청동기시대 중기에 있어서 새로운 제도술이 특정지역과 관련되는지 다양한 창구를 통한 복합적인 것인지는 남아 있는 과제 중의 하나다고 할 수 있다. (안재호)

참고문헌

  • 신라토기(김원룡, 한국의미술 1, 열화당, 1981년)
  • 대평 무문토기 요에 대한 일검토(김현, 진주 대평 옥방1ㆍ9지구 무문시대 집락, 경남고고학연구소, 2002년)

동의어

무문토기(無文土器)

참조어

고배(高杯), 굽다리접시모양토기, 굽달린바리, 굽달린접시, 굽달린항아리, 깊은바리모양토기,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 대부발(臺附鉢), 대부호(臺附壺), 독모양토기, 옹형토기(甕形土器), 두형토기(豆形土器), 발형토기(鉢形土器), 사발모양토기, 호형토기(壺形土器), 얕은바리모양토기, 천발형토기(淺鉢形土器), 완형토기(燔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