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다리접시

굽다리접시

[ 高杯 ]

굽다리접시 본문 이미지 1

굽다리접시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일대의 선사시대 및 고대 용기문화에서 자주 보이는 그릇의 한 종류이다. 중국식 명칭으로는 ‘두(豆)’라고 하는데 주례(周禮)를 참조하면 나물 혹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며 제기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령 주례(周禮) 예기(禮器) 편에는 천자로부터 대부(大夫)에 이르기까지 제례를 지낼 때 사용할 수 있는 제기 두의 개수가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도기나 자기의 형태로 많이 제작되지만 청동기목기로 제작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굽다리접시의 기본형태를 보면 낮은 접시나 깊은 완(盌), 혹은 바리(鉢)와 같은 배신(杯身)에 원통형(圓筒形) 또는 절두원추형(截頭圓錐形)의 다리(臺脚)가 결합된 모습인데 다리를 장식하거나 아니면 그릇의 중량을 가볍게 할 목적으로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굽구멍(透窓)을 뚫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굽다리접시는 다른 어떤 기종(器種)보다도 그릇뚜껑이 따로 제작되어 덮이는 경우가 많아서 같은 시기의 같은 유구에서도 뚜껑없는굽다리접시(無蓋高杯)가 있는가 하면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도 함께 출토되고는 한다.

정백동 8호분 출토 고배

정백동 8호분 출토 고배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굽다리접시가 과연 어떠한 역사적 관련성을 가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수렵채집 위주의 생업경제를 영위하던 단계에는 볼 수 없다가 농경사회에 접어들면서 풍부하게 제작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농경사회의 굽다리접시는 농경사회의 제례용기(祭禮容器)나 혹은 농경민의 개인용 식기(食器)로 추측되기도 한다.

굽다리접시의 가장 오래된 예를 찾으면 중국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조기(早期)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老官台文化期의 白家村 유적에서는 세발토기(三足土器)와 함께 낮은 굽이 달린 굽다리접시가 출토되었다. 중국 신석기문화 중에도 특히 장강(長江) 하류역 숭택(崧澤)문화기의 묘장(墓葬)유구에서는 아주 다양한 형태의 굽다리접시가 보이며, 도기(陶器) 굽다리접시(高杯)로서 일품은 역시 대문구(大汶口)·용산(龍山)문화기의 마연흑도(磨硏黑陶)계의 굽다리접시일 것이다.

청동기시대 이후부터는 청동기 두(豆) 혹은 굽다리접시가 많이 제작되는데 청동두(靑銅豆)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상대(商代) 만기(晩期)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대(周代) 이후에 청동제 굽다리접시가 자주 발견되기는 하지만 도제(陶製) 두가 소멸한 것은 아니며 청동제 두를 흔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경우나 무덤에 소비하기 위한 명기(明器)로서 도제 굽다리접시가 한대(漢代)까지 풍부하게 제작된다. 특히 도기 굽다리접시는 보통 뚜껑없는굽다리접시가 많았었는데 청동기로 제작되면서부터는 뚜껑굽다리접시가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도제 굽다리접시 역시 뚜껑굽다리접시가 더 보편적인 형태로 된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고배

황남대총 남분 출토 고배

한국의 경우 굽다리접시는 신석기시대의 토기에서는 그 예를 보기 어려운데 사천(泗川) 구평리(舊坪里) 패총에서 굽다리접시가 출토된 바 있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굽다리접시가 한 시기의 토기유물군 중에 주된 기종(器種)으로 등장하는 것은 청동기-초기철기시대부터이다. 무문토기 전기까지 올라가는 굽다리접시 중에는 한반도 동북지방에서만 발견되는 편이고 무문토기 중기까지도 주된 기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기철기시대 즉,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단계부터는 굽다리접시가 점차 주기종(主器種)으로서 정착하게 된다. 경남(慶南) 사천(泗川)의 늑도(勒島) 유적이나 해남(海南)의 군곡리(郡谷里) 패총, 광주(光州) 신창동(新昌洞) 유적 등에서는 일상용 토기의 한 종류로서 그리고 대구(大邱) 팔달동(八達洞) 유적에서는 분묘에 부장된 토기의 한 종류로서 많이 제작된다. 이와 같은 전통은 원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어지는데 삼한 중 특히 진·변한(辰·弁韓)지역의 경우에 그러하다. 마한지역에서는 굽다리접시가 제작되지 않는데 반해 진·변한지역의 덧널무덤(木槨墓)에서는 자주 와질토기(瓦質土器) 굽다리접시가 발견되며 이들은 4세기대에 들어와 도질토기(陶質土器) 굽다리접시로 발전한다.

함안 도항리 출토 고배

함안 도항리 출토 고배

삼국시대에 굽다리접시가 아주 중요한 기종(器種)으로 가장 다양하게 발전한 지역은 역시 신라와 가야지역이다. 고구려지역에서는 굽다리접시라는 기종을 보기 어렵고 백제지역은 굽다리접시가 적지 않게 제작되기는 하였지만 신라와 가야지역 만큼 풍부하고 다양하지는 못하다.

백제의 굽다리접시는 대체로 대각이 낮고 투창이 뚫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백제 초기의 예는 서울 강남의 석촌동(石村洞) 고분군의 움무덤(土壙墓)이나 몽촌토성(夢村土城)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굽이 낮고 작은 원공(圓孔)이 뚫리는 것과 같은 형식의 회색연질 혹은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 등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낮은 다리의 굽다리접시류들은 배신(杯身)만으로 보면, 세발토기의 배신이나 뚜껑접시(蓋杯)와 기형상으로 서로 통하는데 이점이 백제 굽다리접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울지방에서 시작된 그러한 백제식 굽다리접시는 호서와 호남지방으로 퍼져나간다. 다만 백제지역 안에서도 충남 논산과 금산 등지에서는 대각이 높고 삼각형이나 원형의 투창이 뚫리는 것도 있어 가야지역의 굽다리접시와 닮은 점을 찾기도 한다.

굽다리접시라는 기종이 가장 많이 제작되고 장기간 다양하게 발전한 지역은 단연 신라와 가야지역이며,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보통 고고학자가 토기편년을 할 때에 형식편년의 기준으로 굽다리접시를 선택한다. 원삼국시대의 와질토기나 적색연질토기 굽다리접시가 4세기대로 넘어가면 도질토기로 제작된다.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이동지역의 신라토기와 이서지역의 가야토기가 양식상으로 구분되어 따로 발전하는 단계는 대개 5세기대에 들어와서부터이고 그 이전 4세기대의 토기는 흔히 ‘고식도질토기’ 단계라고 표현된다. 4세기대의 토기에 지역적인 양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신라·가야 제 지역의 정치세력 권역과 토기양식이 어느 정도 관계했던 5세기대에 비해 그러한 양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A.D. 4세기대 도질토기 굽다리접시의 양식적인 특징을 보면 김해와 부산지역에서는 접시의 가장자리가 한번 꺾여서 마치 뚜껑받이처럼 된 굽다리접시가 유행한다. 대신 함안을 중심으로 하여 영남의 대부분지역에서는 굽이 좁은 원통형으로 되어 있어 한자의 공(工)자를 연상시키는 굽다리접시가 주로 제작되었다. 4세기대 영남지방에서는 주로 뚜껑없는굽다리접시가 유행하였는데 4세기 후반경에 뚜껑굽다리접시가 출현한다. 이 뚜껑굽다리접시는 5세기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발전하여 뚜껑없는굽다리접시보다 비중이 더욱 커진다.

신라와 가야의 토기양식 분화는 주로 굽다리접시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특히 다리의 형태와 굽구멍의 모습이 서로 잘 대비된다. 신라식 뚜껑굽다리접시는 다리의 통이 넓고 외형이 직선적인 절두원추형이다. 그리고 다리에 2단으로 투창을 뚫을 때 아래 단과 위 단을 서로 엇갈리게 하여 사다리꼴의 넓은 굽구멍을 뚫는다.

이에 비해 가야식 굽다리접시의 경우는 다리가 길고 외형이 곡선형으로 펼쳐지는 나팔모양이다. 다리의 굽구멍도 아래위로 나란히 긴네모꼴로 뚫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식상의 뚜렷한 차이점 이외에도, 신라와 가야 각처에서 발견되는 굽다리접시들은 각기 다채로운 특징을 보여준다. 가령 신라양식 분포권 내에서도 경주지역에서는 굽다리접시 뚜껑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가는가 하면 토우를 장식하기도 한다. 함안을 중심으로 한 4-5세기대 굽다리접시 중에 굽구멍이 불꽃무늬로 뚫리는 경우가 많아서 화염형투창굽다리접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5-6세기대 굽다리접시는 낙동강을 경계로 양식구분이 가능하지만 신라식이나 가야식 모두 그 변천의 방향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대체로 그릇의 전체적인 크기가 축소되면서 특히 다리가 짧아지고 굽구멍도 대각의 면적이 좁아 형식적으로 뚫거나 아니면 생략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천을 통해서 이른바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라는 형식이 나타나는데 특히 낙동강 이동지역에서 먼저 발달하여 신라의 가야지역 점령과정을 따라 이서(以西) 지역으로 먼저 확산된다. 이어서 한강유역이나 함경도지역까지 퍼져 나가게 되는데 그 결과 이 짧은굽다리접시는 삼국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토기 형식이 된다.

참고문헌

  • 中國陶瓷史(硅酸鹽學會, 文物出版社, 1982년)
  • 新羅土器(金元龍, 悅話堂, 1981년)
  • 新羅·伽倻土器 編年에 關한 硏究(李殷昌, 曉大論文集 23, 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