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

[ 靑銅器時代 ]

시대개념과 연대 : 청동기시대는 덴마크의 톰센(C.J. Thomsen)이 제안한 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구성된 삼시대체계(three age system) 중의 한 시대로 신대륙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구대륙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대개념이다. 광석에서 구리를 추출한 후 주석, 아연, 납 등 몇 가지 다른 금속과 배합하여 청동기를 주조하는 기술은 고도의 숙련도와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석기만을 사용하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직업의 전문화, 교역의 발달, 계층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는 혁신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대체로 간단한 소형 제품을 만든 동검(銅劍) 이전 시기와 본격적으로 단검(短劍) 등의 각종무기와 공구(工具) 등을 본격적으로 제작 사용하던 동검을 표지(標識)로 하는 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동검 이전 것이라 주장되는 예로서, 遼寧 旅大市 쌍타子 3기, 평북 의주 신암리(新岩里) 하층의 단추, 칼 등이 있다. 그 연대는 B.C. 200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며, 이는 곧 한국 청동기시대의 상한이 될 수 있다. 최근에 북한 학자들은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는 동검의 연대에 대해서 이른바 전자스핀공명 연대측정법으로 B.C. 3000년까지 올리기도 하나, 같이 나오는 중국계 청동무기를 고려하면 B.C. 10세기경을 크게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청동제 단검이 보급되는 시기는 다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시기와 세형동검(細形銅劍)시기, 또는 비파형동검시기, 중간형동검(中間形銅劍)시기, 세형동검시기, 변형동검(變形銅劍)시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 청동기와 함께 철기가 사용되는 세형동검시기 이후는 청동기시대라기 보다는 초기철기시대 혹은 철기시대로 보아야 한다. 중국 전국계(戰國系)의 철기문화가 한반도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B.C. 300년경이므로 철기시대의 상한 혹은 청동기시대의 하한은 B.C. 300년 또는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남한에서는 청동기시대가 바로 민무늬토기시대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B.C. 10세기경에서 B.C. 1세기까지로 편년되는 남한의 민무늬토기시대를 초기, 전기, 중기, 후기, 말기의 5기로 구분할 때 B.C. 3~2세기경으로 편년되는 후기 이후에는 세형동검 등의 한국식 청동기문화와 함께 철기가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동기 제작 : 비파형동검시기에 요하(遼河) 유역에서 한반도에 걸쳐 나오는 청동기는 요서(遼西), 요동(遼東), 길림(吉林)과 한반도의 각 지역마다 발견되는 청동기의 종류가 다르다. 요서지역에서는 遼寧省 昭烏達盟 南山根과 小黑石溝 유적의 경우처럼 중원 특유의 제기(祭器) 혹은 예기(禮器)가 다량 출토되지만,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요동지방에서는 沈陽 鄭家漥子 널(棺)무덤에서 보듯 각종 차마구와 무기, 공구류, 청동거울이 보급된다. 그러나 길림지역과 한반도에서는 동경(銅鏡)과 동검(銅劍), 동도끼(銅斧), 동종방울(銅鐸), 동끌(銅鑿), 동화살촉(銅鏃)이 대부분이며, 요동과 요서지방에서 나오는 차마구(車馬具)와 제기(祭器)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에 걸쳐 제작되는 대표적인 청동기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다뉴경(多鈕鏡)을 들 수 있다. 비파형동검은 검신 하부 폭이 점차 약화되면서 후기형으로 변화하며, 거울은 처음에 번개무늬로부터 시작하여 별무늬 혹은 방사상무늬로 변하는데 세형동검(細形銅劍)과 동반하는 세문경(細文鏡)과 달리 문양선(文樣線)이 거친 조문경(粗文鏡) 형식이다. 이밖에 창끝과 동도끼(銅斧)도 있는데 창끝도 단검처럼 비파형이며, 도끼는 날이 버선코모양인 부채꼴동도끼(扇形銅斧)가 특징이다. 이들 청동기는 그 종류에 따라 합금비율을 의도적으로 달리하는데 거울의 경우 주석이 대체로 20% 이상 섞이며 동검의 경우는 대체로 5~20% 정도 섞인다.

청동기를 주조했던 거푸집(鎔范)은 대부분 활석제(滑石製)이나,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과 각종 방울을 비롯한 정교한 의기(儀器)를 만드는 데는 토제품을 이용한 밀납주조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세형동검시기에 성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푸집의 실제 발견 예를 살피면 비파형동검은 遼寧省 朝陽縣 勝利鄕의 예가 있고, 비파형투겁창은 함경남도 금야읍(金野邑) 출토 예가 있다. 동도끼의 예는 遼寧省의 旅大市 崗上, 新金縣의 雙方과 碧流河 등의 돌무지무덤(積石墓), 돌널무덤(石棺墓), 고인돌(支石墓) 등의 부장품으로 많이 발견되고, 화살촉 거푸집은 遼寧 西豊縣 진흥진의 예가 있다.

농경 : 한반도에서의 벼농사는 늪지유적에서 나온 화분과 볍씨 등을 통해서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집자리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나온 실물증거로 보아 확실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실제로 청동기 생산의 전문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잉여 식량 생산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대동강유역의 평양 남경(南京), 한강유역의 여주 흔암리(欣岩里), 금강유역의 부여 송국리(松菊里), 서해안의 안면도 고남리(古南里)의 집자리에서 탄화미(炭化米) 실물자료가 나온 바 있다. 잡곡으로서는 보리, 밀, 조, 피, 수수, 콩, 팥, 기장 등이 남북한 여러 집자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일본에는 B.C. 4~3세기경 야요이(彌生)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논 유적이 한반도와 가까운 九州 福岡市 板付와 菜田 등지에서 조사되었다. 이들 논 유적과 관련된 야요이 초기 단계 유적에서는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민무늬토기 중기단계의 송국리형(松菊里型) 토기문화에 속하는 홈자귀(有溝手斧),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 붉은간토기(紅陶)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하여 적어도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B.C. 6~4세기경 청동기시대 중기에는 논농사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남강(南江)유역의 경남 진주(晋州) 대평리(大坪里)와 울산(蔚山) 무거동(無去洞) 옥현(玉峴) 유적의 여러 지점에서 밭 터와 논 터 유적이 나온 바 있다. 대평리 유적에서는 하천변 충적대지 중 자연 제방의 안쪽에 집자리(住居址)와 함께 청동기시대의 밭 터가 조사되었는데 이랑과 고랑이 뚜렷하고, 한쪽 귀퉁이에는 야채를 심었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밭보다 약간 높은 자연제방 위에는 밭일을 하던 사람들이 거주했던 7~8기의 소형 움집자리가 확인되어 여러 세대가 공동 경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경작지를 조성하는데 쓰이는 농경구로는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된 돌로 만든 보습, 괭이가 남·북한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대형의 돌도끼와 홈자귀(有溝手斧) 등과 함께 대팻날과 끌 같은 목제 가공용의 석기 등이 많이 나오는 사실과 한국계 유물과 함께 일본 구주에서 발견되는 각종 목제 기경구(起耕具)로 미루어 비록 실물자료가 수집되지 않았지만 청동기시대에 한반도에서도 목제품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금릉(金陵) 송죽리(松竹里)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 타원형의 자루구멍에 자루가 달린 목제 괭이가 출토된 바 있다. 북한에서는 평안북도 함주 주의리 늪지에서 출토한 목제 후치(초) 2점이 이 시대의 것으로 주장된 바 있으나, 공반유물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곡물을 베어 수확하는데 사용하는 농경구는 한반도 전역에서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이 많이 발견되는데, 삼각형(三角形), 장방형(長方形), 물고기모양(魚形), 배모양(舟形) 등 형태가 다양하다. 특히 삼각형석도는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송국리형집자리 그리고 홈자귀와 세트를 이루는데 쌀 농사와 관계가 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마을과 사회 : 전(前) 시대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많은 마을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환경에 따른 생업기술이 발전하여 이전에 살지 않았던 다양한 입지를 선택한다. 마을의 입지는 지역에 따라 해안과 강변의 저지대, 저구릉, 구릉정상 등으로 구분된다. 해안가 유적으로는 조개무지(貝塚)를 갖는 충남 서산 안면도(安眠島) 고남리(古南里), 제주도 대정 상모리(上慕里) 유적을 들 수 있다. 강변의 충적지대 유적으로는 평양 호남리(湖南里) 남경(南京), 경북 금릉(金陵) 송죽리(松竹里), 경남 진주(晋州) 대평리(大坪里) 유적을 들 수 있으며 이들 해안가 유적과 강변 충적대지상의 집자리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자리와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유적의 상당수는 전(前) 시대와 달리 하천에서 다소 떨어진 구릉상에 입지 하는데, 부여 송국리(松菊里), 울산 검단리(檢丹里), 천안 백석동(白石洞)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산 정상의 고지성(高地性) 구릉에 위치하여 방어적 성격이 강한 마을터로는 아산 교성리(校成里), 창원 서상동(西上洞) 남산 유적을 들 수 있다.

방어를 위한 시설로서 취락 주위에 긴 구덩이로 된 환호(環濠)와 나무 기둥 울타리(木柵) 등이 조성된 마을도 적지 않게 확인된다. 그만큼 집단간의 싸움이 빈번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환호가 확인된 유적으로는 앞서의 울산 검단리(劍丹里), 진주 대평리(大坪里), 창원 서상동(西上洞) 남산(南山) 유적이 있다. 그 중 대평리에는 이중환호가 있고, 서상동에는 깊이 4m가 되는 이 시대 최대규모의 단면 ‘V’자형 환호가 조사되었다.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는 지름 20㎝ 정도의 굵은 나무를 잇대어 만든 목책 시설이 확인된 바 있다.

한편 이 시대의 집자리는 대부분 반움집으로 평면형태에 따라 장방형(長方形), 방형(方形), 그리고 원형(圓形)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장방형 집자리는 남북한 전역에서 비교적 이른 단계에 확인되고 있다. 북한의 평양 남경 유적, 함북 회령(會寧) 오동(五洞), 나진(羅陳) 초도(草島) 등과 남한의 경기도 여주 흔암리(欣岩里), 충남 천안 백석동(白石洞)을 비롯해서 경남 진주 대평리 유적 등에서 조사되었다. 그 중에는 길이가 20m 가까운 세장방형(細長方形)의 집자리가 천안 백석동에서 구릉을 따라 분포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청동기시대 중기의 송국리 유적에서 최초로 확인된 집자리 형태는 한가운데에 2개의 기둥구멍(柱孔)이 있는 원형 집자리이다. 한반도 남부지방과 일본에 걸쳐 널리 퍼져있는 이 집자리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전남 영암 장천리(長川里), 진주 대평리, 울산 검단리를 들 수 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세장방형이나 장방형 집자리는 여러 세대가 거주하거나 공동집회소로 쓰였던 가옥(家屋)으로 추정되며 규모가 작은 원형의 집자리는 단일 가족의 가옥으로 보인다. 따라서 세장방형이나 장방형의 대형집자리에서 원형 혹은 말각방형(抹角方形)의 소형 집자리로 변천했다는 것은 전기에는 여러 가족이 한 집에서 공동으로 생활을 하다가 점차 단일 가족별로 주거공간을 독립하여 생활을 꾸리는 경향이 강해졌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무덤과 제사유적 : 전(前) 단계와 달리 이 때부터는 일정한 시설을 갖춘 무덤들이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된다. 일정한 묘역을 만들어 그 안에 수 기 혹은 수십 기의 무덤을 만들기도 하며, 수백 기가 일정지점에 축조되어 대규모 공동묘지를 만들기도 한다. 단순히 토광을 파서 시신(屍身)을 묻은 무덤형식도 있지만, 판돌(板石)이나 깬돌(割石)로 관(棺)이나 곽(槨)을 짜 만들거나, 그 위에 다시 커다란 덮개돌(上石)을 올린 고인돌이 요동지방에서부터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수만 기가 넘게 확인된다.

고인돌은 크게 탁자식(北方式)과 기반식(南方式)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지명을 따라 침촌리형(沈村里型), 오덕리형(五德里型), 묵방리형(墨房里型) 등으로 분류하는데 침촌리형은 일종의 집단묘이다. 한 기씩 있는 예도 있지만 수십 기에서 수백 기에 이르기까지 군을 이르는 경우도 많다. 우선 탁자식은 요녕성(遼寧省)을 비롯하여 길림(吉林)지역과 서북한(西北韓)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큰 것 중의 하나로 대동강 하구의 남포시 용강읍 석천산(石泉山) 예가 있는데 덮개돌은 길이, 폭, 높이가 6.3×4.0×1.7m의 규모이다. 최근에 평남 성천군 용산리(龍山里)에서는 여러 개의 판돌로 만든 돌칸방 매장시설을 반지하식으로 만들어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고인돌이 발견된 바 있어 주목된다.

개석식(無支石式) 역시 요령성 지역에서부터 남한지방과 멀리 일본 큐우슈우(九州)지방에까지 분포하는데 중국에서는 대석개묘(大石蓋墓), 북한에서는 묵방리식 등으로 불린다. 덩이돌(塊石形) 고임돌(支石)을 고인 남방식고인돌 중에는 고임돌이 5~10개 되는 예가 한반도 남부지방 여러 지역에서 확인된 바 있다.

돌널무덤(石棺墓)은 판돌로 된 경우와 깬돌로 된 경우가 있다. 판돌의 경우, 각 벽을 1~2매로 축조한 것과 다시 여러 매로 짠 것이 있는데, 적석묘역(積石墓域)을 설정하고 그 안에 수십 기가 배치된 예가 있으며, 고인돌 주변에 배치된 예도 많다. 또한 중국 동북지방에서 한반도 남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한편 무덤 근처에 선돌(立石) 유적이 있는 예가 있는데 선돌을 중심으로 제단(祭壇)유적을 만든 경우가 대구 진천동(辰泉洞)에서 조사된 바가 있다. 창원 덕천리(德川里)에서는 고인돌을 가운데에 두고 주변에 2~3단의 적석기단(積石基壇)을 마련하여 장방형의 제단을 만들었다. 이러한 선돌 유적 이외에도 하천변의 바위절벽이나 구릉 계곡에 위치한 바위 등이 제사터로 이용되기도 한다. 태양 등을 상징하는 상징적 무늬와 사슴, 호랑이, 고래 등의 동물과 이를 포획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표적인 유적이 경북 고령 양전동(良田洞), 흥해 칠포리(七浦里), 울산 천전리(川前里), 반구대(盤龜臺) 등 주로 영남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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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 靑銅器文化의 硏究(林炳泰, 學硏文化社, 1996년)
  • 靑銅器·鐵器時代의 社會와 文化(李淸圭, 韓國史 1, 한길사, 1994년)
  • 韓國의 靑銅器文化(國立中央博物館, 1993년)
  • 日韓交涉の考古學-彌生時代篇(小田富士雄·韓炳三編, 六興出版, 1991년)
  • 韓國 靑銅器時代 文化의 理解(沈奉謹, 東亞大學校出版部, 1990년)
  • 조선고고학전서-고대편(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8년)
  • 韓國靑銅器文化硏究(尹武炳, 一志社, 1987년)
  • 조선의 청동기시대(황기덕, 사회과학출판사, 1984년)
  • 토기와 청동기(韓炳三, 교양국사총서, 197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