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검

동검

[ 銅劍 ]

세형동검 일괄(대구 팔달동 100호, 45호 출토 세형동검)

세형동검 일괄(대구 팔달동 100호, 45호 출토 세형동검)

검몸〔劍身〕의 길이가 20∼40㎝ 내외인 단검(短劍)으로 날이 대칭적으로 곡선 혹은 직선을 그리고, 검몸 한가운데에 등대가 있으며, 자루〔柄部〕가 별도로 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인접한 쭝위엔(中原)지역의 동검이 등대 없이 곧은 양날, 중국 북방 혹은 몽골 시베리아 지역의 동검이 한쪽으로 휘인 날에, 모두 자루를 함께 주조하는 것과 다르다. 좌우 돌출이 심한 자루의 끝 장식이 별도로 제작되는데, 북방식동검이 고리모양이나 동물머리 또는 방울 장식, 중국식은 원판형 장식인 것과 달리 꼬치모양이나 십자형인 것이 대조가 된다. 이러한 청동단검은 리야오허(遼河)유역에서 한반도에 걸쳐 일본 긴키(近畿) 지방까지 분포하는데, 그 형식을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세형동검(細形銅劍)으로 구분한 것이 일반적이다.

비파형동검은 검몸〔劍身〕의 아래부분이 둥글게 배가 불러 비파(琵琶)처럼 생겼다고 붙인 이름으로, 리야오닝(遼寧)지방에서 주로 출토되었다고 하여 ‘리야오닝식동검(遼寧式銅劍)’, 고조선과 관련되었다 하여 ‘고조선식동검(古朝鮮式銅劍)’, 혹은 곡선형의 날을 가졌다고 하여 ‘곡인청동검(曲刃靑銅劍)’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요녕식동검 일괄(傳 상주, 부여 송국리, 여수 적량동 유적 출토)

요녕식동검 일괄(傳 상주, 부여 송국리, 여수 적량동 유적 출토)

비파형동검은 돌기의 위치와 검몸의 폭, 그리고 검자루를 기준으로 하여 대체로 3형식으로 분류한다. 돌기가 검몸의 끝에 치우쳐 있고 하단의 검날이 불룩한 1형식으로 리야오닝성 푸란띠앤(普蘭店) 쑤앙파앙(雙房) 출토예가 대표적이고, 돌기가 중앙에 있는 2형식은 차오양(朝陽) 쓰얼타이잉즈〔十二台營子〕 출토예가, 그리고 3형식은 돌기가 검몸 하단에 있고 다소 폭이 좁아진 형식으로 써언양(瀋陽) 쩌엉지아와즈〔鄭家窪子〕 출토예가 대표적이다.

한반도에서는 현재까지 약 40여 자루가 알려져 있는데, 함경도 지방을 제외하고 거의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발견되는 유적은 리야오허(遼河) 유역에서는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나무널무덤〔木棺墓〕, 움무덤〔土壙墓〕, 한반도에서는 돌널무덤〔石棺墓〕과 고인돌〔支石墓〕에서 출토되고 있다. 최근까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에서 출토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왔는데, 전남지방 보성강유역과 여수반도의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에서 수 점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바 있다.

세형동검은 일제때 일본인 학자들이 일본의 폭넓은 광형(廣形)동검에 대조가 된다 하여 처음 붙여진 이름이다. 세형동검은 넓은 의미로는 만주-한반도-일본 큐슈(九州)지방에서 출토되는 일체의 폭 좁은 동검을 가리키며, 좁은 의미로는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일본 큐슈지방에서 발견되는 어임〔抉入部〕이 있는 동검만을 가리킨다. 후자의 경우를 특히 한국식동검(韓國式銅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형동검 자체에 대한 세분된 형식분류의 기준은 대부분 등날이 어임 부분 아래까지 형성되어 있는가 여부와, 검의 폭과 검몸 아래의 만곡도(彎曲度), 그리고 학자에 따라서는 검끝〔鋒部〕의 길이, 등대와 검몸 폭의 비율, 피홈〔血溝〕의 유무(有無)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등날의 위치가 제1마디까지인가 혹은 제2마디까지인가를 기준으로 한 분류안은 모든 학자가 인정하고 있다. 윤무병의 Ⅰ식과 Ⅱ식이 대표적으로, 각각 대전 괴정동 유적과 황해도 정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동검이 대표적이다.

이들 전형적인 동검은 한(漢)나라 철기가 유입된 이후까지도 지속되는데, 한식(漢式)철기와 공반하는 세형동검 중에는 전형적인 예에서 벗어난 형식이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황주 흑교리 유적 동검처럼 피홈이 있거나, 대구 평리동 유적의 동검처럼 등날이 슴베까지 형성된 예도 있다.

이러한 세형동검이 한반도에서 만들어졌다는 적극적인 증거는 용인 초부리 유적을 비롯하여, 특히 전남 영암에서 일괄 출토된 청동기 거푸집〔鎔范〕을 들 수 있다. 이 거푸집에서 보면 세형동검은 어임 부분이 명확하지 않고 등대의 날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 동검의 날과 등대의 날은 주조(鑄造)된 후 성형된 것으로 이해된다.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유적은 대부분 돌덧널무덤〔石槨墓〕과 나무널무덤이며, 고인돌이나 돌널무덤 그리고 후대의 덧널무덤〔木槨墓〕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다. 세형동검이 고인돌에서 출토되었다고 보고된 예는 영암 장천리 유적의 기반식〔碁盤式, 南方式〕 고인돌, 양평 상자포리 고인돌, 김해 내동 고인돌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확실하게 돌덧널 안에서 출토되지 않아 고인돌과의 소속관계를 단정짓기 어렵다.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예로서는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부여 남성리, 함평 초포리 유적이 있다. 이들 돌덧널무덤에서는 다량의 세형동검 Ⅰ·Ⅱ식과 함께 청동방울〔銅鈴〕과 잔무늬거울〔細文鏡〕은 물론 동꺾창〔銅戈〕과 동투겁창〔銅棠〕 등이 함께 출토된다. 널무덤에서 출토된 예로는 남한지방에서는 창원 다호리 유적, 북한지방에서는 부조예군묘(夫租濊君墓)의 출토가 대표적이다. 이 널무덤에서는 날끝이 긴 형태〔長鋒〕의 세형동투겁창과 함께 철기 뿐 만 아니라 한대(漢代) 화폐도 함께 출토되었다.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 두 형식의 동검은 전부 자루를 별도로 주조한다는 점, 검몸 한가운데에 등대가 있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되고,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의 것이 있어, 상호 계승관계가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해방전에 비파형동검은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아서 세형동검의 이형(異形)에 지나지 않고, 전형적인 세형동검보다 늦은 형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 차오양 쓰얼타이잉즈에서 한반도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비파형동검과 거친무늬거울〔粗文鏡〕이 출토되고, 부여 송국리 유적 등 한반도 여러 곳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견되면서, 명실공히 세형동검에 앞서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동검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동검의 연대를 보면 우선 비파형동검은 닝처엉(寧城) 난싸안거언(南山根) 유적에서 춘치우(春秋)시대 구어구어(暠國)의 묘에서 출토된 중국식동과의 연대로 보아 기원전 8세기 전후한 시기가 중심연대로 볼 수가 있다. 전형적인 세형동검은 명도전(明刀錢) 관계 유적과의 명확한 분포상의 차이로 보아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하한(下限)은 널무덤 유적에서 전한경(前漢鏡)과 한대(漢代)화폐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후한 시기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청규)

참고문헌

  • 한국청동단검의 형식분류(윤무병, 진단학보 29·30, 진단학회, 1966년)
  • 세형동검의 형식분류와 그 변천에 대하여(이청규, 한국고고학보 13, 한국고고학회, 1982년)
  • 조선고고학전서(고대편)(박진욱,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년)

참조어

고조선식동검(古朝鮮式銅劍), 곡인청동검(曲刃靑銅劍), 리야오닝식동검(遼寧式銅劍),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세형동검(細形銅劍), 요녕식동검(遼寧式銅劍), 한국식동검(韓國式銅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