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호리 유적

다호리 유적

[ 昌原 茶戶里 遺蹟 ]

지역 창원
다호리 B1호 석실분 및 주구

다호리 B1호 석실분 및 주구

다호리 B18호 수혈식석관분

다호리 B18호 수혈식석관분

다호리 1호분 통나무목관

다호리 1호분 통나무목관

경상남도 창원시(舊地名:의창군) 동면 다호리 232번지(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에 위치하고 있는 철기시대의 분묘유적이다. 1988-1991년까지 6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널무덤(木棺墓) 총 44기가 조사되었으며, 1988년 8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유적의 북쪽 약 1㎞ 정도에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으며, 북쪽으로 약 10㎞를 가면 낙동강의 본포(本浦)나루에 이른다.

또한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면 김해, 부산까지 갈 수 있어 당시에도 이 강을 따라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논밭 일대는 해발 433m의 구룡산(九龍山) 북서줄기와 이어지는 해발 20m 정도의 야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야트막한 구릉이었던 곳으로 현재는 감나무 과수원과 계단식 논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유적의 분포범위는 야산에서 구릉의 아래쪽으로 너비 30-40m, 길이 150m에 달한다.

인접한 유적으로는 성지(城址)와 고분군(古墳群)이 알려져 있다. 성지는 동면 무성리의 무성성지와 북면 화천리 성지가 있다. 무성성지는 해발 69m의 산 정상부에 위치한 토성으로, 현재 남-북의 길이가 100m 정도이다. 화천리 성지는 둘레가 약 600m로서 석축부분도 확인되고 있다. 고분군으로는 동면의 봉곡리 고분군, 북면의 화천리 고분군 및 동전리 고분군 등이 확인되고 있다.

1·2차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총 15기이나 후대의 1기를 제외하면 14기가 된다. 이 중에는 독널무덤(甕棺墓)이 2기이고, 나머지는 모두 널무덤(木棺墓) 계통의 것들이다. 이들 널무덤은 크게 3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유형은 무덤구덩이(墓壙)의 규모가 비교적 크고 깊은 편으로 길이, 너비, 깊이가 2.4-2.78×1.1-1.36×1.2-2.05m의 것이다. 다른 유형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무덤구덩이 바닥면 중앙부에 장방형의 부장갱(副葬坑)이 있으며 부장품이 비교적 많은 점이다.

제2유형은 무덤구덩이의 규모가 제1유형과 비슷한 예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약간 작은 편이며 무덤구덩이 바닥면 중앙부의 부장갱은 보이지 않는다. 무덤구덩이의 규모는 2.0-2.7×0.8-1.25×0.9-1.68m 정도이다.

제3유형은 무덤구덩이의 규모가 제일 작고 얕다. 규모는 1.6-2.0×0.55-0.64×0.2-0.4m 정도이며, 역시 무덤구덩이 바닥면 중앙부의 부장갱은 보이지 않는다. 1·2차 조사에서는 나무널의 실체를 확인한 것이 커다란 성과 중의 하나인데, 널은 통나무로 제작되어 있었다. 또한 부장양식에서도 관내부장(棺內副葬) 뿐만 아니라 널 아래에 설치한 부장갱을 비롯한 널 아래의 부장방법이 확인된 것은 앞으로의 조사에도 많은 참고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즉 나무널이 썩어 존재하지 않았다면 널 아래의 부장품을 관내 부장품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다호리 30호묘 일괄철기

다호리 30호묘 일괄철기

유물은 철기류, 칠기류, 토기류로 나눌 수 있다. 철기류는 많은 양이 출토되었고 종류면에서도 매우 다양하다. 무기류로는 철검(鐵劍), 쇠투겁창(鐵矛), 쇠꺾창(鐵戈), 쇠화살촉(鐵鏃) 등이 있다. 철검의 경우 검파(劍把)나 검파두식(劍把頭飾)은 청동으로 제작되어 세형동검문화단계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검신(劍身)이 철로 바뀌고 단조품(鍛造品)이기 때문에 등대, 혈구(血溝) 등이 보이지 않는다.

쇠꺾창의 경우도 단조품이라 등대와 혈구가 없을 뿐 동꺾창과 동일한 형태이다. 쇠투겁창의 경우는 형태에 있어 북부지역의 용연동(龍淵洞) 및 상리(上里) 유적 출토품과 통하고 있어 중국식동모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쇠화살촉은 무경역자식(無莖逆刺式)으로 그동안 조양동, 노포동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공구류는 쇠도끼가 중심을 이루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주조(鑄造)의 공부(斧)는 공부(部)의 단면이 제형(梯形)을 이루고 세신을 가진 것, 단조(段造)의 판상쇠도끼(板狀鐵斧), 방주상쇠도끼(方柱狀鐵斧), 그리고 쇠판을 말아 붙여 공부를 형성하고 어깨를 가진 유견쇠도끼(有肩鐵斧) 등이 있다. 이러한 쇠도끼들은 형태적으로 모두 독특한 것으로 중국의 쇠도끼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목병(木柄)이 부착된 쇠도끼들을 보면 목병에 삽입한 방법이 오늘날의 도끼와 같은 형태, 자귀와 같은 형태의 2가지 방법이 있다. 도끼와 같은 형태는 나무를 베거나 무기로 사용하였다고 생각되며, 자귀와 같은 형태는 깎거나 다듬는 공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판상쇠도끼는 도끼와 같이 사용하기도 하고 ‘ㄱ’자형의 자루에 묶어 자귀와 같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농기구로는 따비와 낫이 있다. 따비는 2종류가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폭이 좁고 길며 단면이 삼각형을 이룬 것이며, 다른 하나는 폭이 좀 더 넓고 짧은 것이다. 따비는 오늘날의 따비와는 형태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앞 부분 끝(先端部)의 휘어진 각도로 보아 따비로 보인다. 낫은 오늘날의 낫과 형태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칠기류는 많은 양이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해 이 시기의 칠문화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각종 용기류(容器類)를 비롯해 무구류(武具類), 공구류(工具類), 농공구류(農工具類), 그리고 붓, 판자(板子)에 이르기까지 일반화되어 있다. 칠은 거의 모두가 흑칠(黑漆)인데 주칠(朱漆)도 보인다. 칠기 중 용기류의 기형은 남부지방의 후기무문토기 기형과 유사한 것이 많다. 칠기는 그동안 세형동검문화기의 서흥 천곡리, 아산 남성리, 함평 초포리 유적 등에서 발견된 바 있어, 적어도 세형동검문화기부터는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호리 B27호 일괄 고령계토기

다호리 B27호 일괄 고령계토기

토기류는 무문토기(無文土器)와 와질토기(瓦質土器)가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분묘에서 무문토기와 와질토기가 공반되고 있어 이 유적 출토 무문토기와 와질토기는 큰 시기 차 없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무문토기의 기형에는 독모양토기(甕形土器),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두형토기(豆形土器), 토기뚜껑, 주머니호가 있다. 와질토기는 쇠뿔손잡이항아리(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와 주머니호가 대표적인 기형이다.

한편 제1호 분에서는 각종 청동기, 철기, 칠기 등 수많은 부장품이 통나무널과 함께 완벽한 형태로 출토되어 주목되는데, 특히 부장품 중에는 다섯 자루의 붓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에서의 고대문자 사용에 대한 고고학적 물증이 될 수 있으며, 원삼국 초기 대외교역의 서사용구(書寫用具)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3·4차 조사에서는 널무덤 15기가 조사되었는데 1·2차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들과 유사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새롭게 확인된 것을 살펴보면 단야공구(段冶工具)의 하나인 쇠망치(鐵鎚)가 출토되었다. 이 쇠망치의 확인으로 많은 단조쇠도끼(鍛造鐵斧)가 이 지역에서 직접 제작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쇠망치는 쇠집게, 모루 등과 함께 세트를 이루는 단야구로 평양 정백동 62호묘에서도 쇠집게와 함께 출토된 바 있다.

철제 고사리형장식부철기(裝飾附鐵器)가 출토되었다. 그동안 알려진 철제 고사리형장식이 있는 철기로는 경주 조양동 목곽묘에서 출토된 ‘S’자형 말재갈멈추개와 경주 구정동 목곽묘출토의 철모, 가야고분 등에서 출토되는 미늘쇠(有刺利器)와 판갑옷(板甲) 등이 있는데 모두 철기시대 후기 이래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런 철기의 전통을 이 유적에서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철판을 두드려 길게 늘인 뒤 둥글게 말아 붙인 제작방법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칠기에서도 새로운 것이 확인되었는데 1·2차 조사시는 칠기에서 주칠이 보이지 않았으나 원통형(圓筒形)칠기의 구연부 상단에 주칠로 된 삼각거치문(三角鋸齒文)이, 칠초(漆鞘)에는 주칠로 된 선문(線文)이 있어, 이 시기에 흑칠 이외에도 주칠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칼집도 확인되었다. 칼집은 형태가 세장한 장방형의 것으로 기존에 타 유적을 통해서 알려진 형태와 더불어 칼집 형태의 새 자료가 확인된 것이다. 토기에서도 1·2차 조사에서 발견되지 않은 승문(繩文)이 타날된 토기가 출토되었다. 세승문(細繩文)이 타날되고 그 위에 1조의 선문이 있는 항아리(短頸壺)가 출토되어 이 유적이 철기시대 전기에 속하는 유적이지만 약간의 연대폭을 가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소형토기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우각형동기(牛角形銅器), 유구동기(有鉤銅器), 쌍두관상동기(雙頭管狀銅器)가 정식 발굴조사에 의해 출토되어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5·6차 조사에서는 총 15기의 널무덤과 독널무덤 2기가 조사되었다. 대체적인 내용은 1-4차 조사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특징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4차 조사시와는 달리 제1유형으로 분류한 널무덤이 발견되지 않은 점이다. 즉 무덤구덩이의 바닥면에 부장갱을 설치한 유구가 전혀 조사되지 않았다. 물론 제3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도 2기 밖에 되지 않고 모두 제2유형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는 시기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 다른 특징은 부장품 중 청동제품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굴의 피해를 입은 것이 많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소편(小片)이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점은 주목된다.

1-4차 조사에서는 청동유물이 여러 점 출토된 1호분을 제외하고는 일부 널무덤에서 동검(銅劍), 동모(銅矛) 등의 무기류가 1-2점씩 출토되었다. 무기류에만 일부 상징적으로 잔존되었던 세형동검문화의 내용이 시기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인접된 분묘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다호리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철기문화를 소화함으로써 청동기문화가 급격히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원통형의 칠기화살통이 출토되었다. 화살통은 흙에 눌려 납작한 채로 발견되었으며 상태가 불량하여 칠피(漆皮)만 남아 있으나 형태를 복원할 수 있었다. 동검의 칠초와 같이 표면에 문양이 없고 흑칠에 돌대(突帶)가 돌려진 것으로 보아 이 시기 한국의 특징적인 유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돌대로 보아 목태(木胎)로 추정되며, 길이가 90㎝ 정도로 긴 것으로 보아 이 화살통과 세트를 이루는 활은 장궁(長弓)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원통형화살통의 발견 예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방언(方言)』과 『좌전(左傳)』의 기록에 보이는 독환(丸)과 『설문(說文)』 및 『한서(漢書)』 한연수전(韓延壽傳)에 보이는 ‘란()’이라고 하는 뚜껑 있는 통형의 화살통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 화살통이 독환 및 란으로 불리우는 유물이나, 그림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렵다. 후한(後漢) 기남화상석(沂南畵像石)에는 활을 집어넣은 건()과 함께 원통형 같이 좁고 긴 형태의 화살통이 표현되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원통형 칠기화살통의 실물 출토 예로는 평양의 낙랑고분인 석암리(石岩里) 219호분에서 출토된 것 2점이 있다. 이 중 1점은 길이가 71.95㎝로 다호리 출토품에 비해 짧은 편이며, 내부에서 화살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화살통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형태 뿐이다.

운두가 얕은 뚜껑이 있는 원통형의 것으로 흑칠에 투조은판(透彫銀板) 장식이 가해진 것이며 신부(身部)의 속심은 피혁(皮革)이다. 다른 1점은 형태, 길이가 같으나 칠화문상(漆畵文像)이 있는 것이다. 다호리 출토품과는 원통형 칠기화살통이라는 점만 같을 뿐이지 길이, 장식, 문양 등 세부적인 형태에서 차이가 난다. 그동안 화살통은 고분시대의 호록(胡)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므로 철기시대 초기로 올라가는 새로운 형태의 화살통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것은 의미가 크다. 또 다른 특징은 토기에 있어서 소위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가 출토되어 이전에 발견된 이러한 형식의 토기류들의 성격 파악에 도움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1-4차 조사에서 발견된 소형토기로 검은간토기 목긴항아리(黑陶長頸壺)가 출토되었는데 세형동검문화의 대표적인 검은간토기 목긴항아리가 와질토기 목긴항아리 이외에 소형토기로서도 그 전통을 잇고 있었던 점은 매우 특이하다.

이밖에 회문(回文)과 같은 새로운 칠기문양이 확인되었고 철제낚싯바늘도 출토되었다. 그동안 칠기문양은 주칠의 단순한 선문 또는 삼각거치문 정도가 알려졌으나, 5·6차 조사에서와 같이 문양만 돋보이게 하여 흑칠로 처리한 것도 확인되어 당시 칠공예(漆工藝)의 수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철제 낚싯바늘의 부장은 다호리 주민이 낚시어업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쇠망치가 출토된 제17호분의 피장자가 대장장이와 같은 철기제작에 종사하였던 인물이라고 할 때, 낚싯바늘이 출토된 분묘의 피장자는 어업에 관계된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유물 가운데 칠초세형동검(漆細形銅劍), 칠초철검(漆鐵劍), 철과(鐵戈), 쇠뿔잡이항아리 등의 유물은 서북지방 널무덤에서 출토된 고조선(古朝鮮)적 요소와 남부지방의 철기시대 문화의 연속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성운경(星雲鏡), 오수전(五銖錢), 대구(帶鉤), 칠목기(漆木器), 칠초철검(漆鐵劍), 고리자루칼(環頭刀) 등은 중국적 요소인 한식유물(漢式遺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경주 조양동에서도 일부가 출토된 바가 있다. 이것은 철기시대 초기에 한반도 남부지방과 한(漢), 낙랑(樂浪)과의 교섭이 활발하였음을 알려 주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 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 Ⅲ(李健茂·尹光鎭·申大坤·鄭聖喜, 考古學誌 第5輯,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3년)
  • 茶戶里遺蹟 出土 붓(筆)에 대하여(李健茂, 考古學誌 第4輯,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2년)
  • 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 Ⅱ(李健茂·尹光鎭·申大坤·金斗喆, 考古學誌 第3輯,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1년)
  • 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 Ⅰ(李健茂·李榮勳·尹光鎭·申大坤, 考古學誌 第1輯,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