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

무기

[ 武器 ]

적과 싸울 때에 쓰는 도구로, 때로는 무기가 생활재료를 얻기 위한 중요한 생산도구의 역할도 겸하였다. 그런데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의 무기는 주로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특히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특별히 힘을 기울여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었다. 무기의 소재도 돌로부터 청동, 철로 변화하였고 또 그 기능도 다양해져서 공격용 무기에 대하여 방어용의 무기가 개발되었으며 전쟁의 기술, 즉 전술도 고도로 발전하였다. 전쟁에 쓰인 무기는 일정한 특징에 따라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 그 밖의 전투용구로 나뉘게 된다. 전투용구란 군대의 전투 행동을 돕는 데에 쓰이는 여러 가지 기재들, 곧 통신기재, 수송기재, 군마, 군기, 악기 등을 말한다.

선사시대의 무기류는 용도에 따라 쏘는 무기, 베는 무기, 치는 무기, 찌르는 무기, 걸어 당기는 무기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재료는 주로 돌과 청동이 쓰였다. 쏘는 무기에는 활(弓)과 화살(矢), 돌화살촉(石鏃), 청동화살촉(銅鏃)이 있다. 활은 나무나 뿔, 뼈 같은 유기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물이 남아 발견된 예가 없다. 화살도 그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은 없으나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살은 활촉, 화살대, 화살깃으로 이루어졌는데 선사시대의 화살 유물로서는 돌화살촉만 남아 있다.

돌화살촉은 그 제작기술에 따라 크게 깬돌화살촉(打製石鏃), 간돌화살촉(磨製石鏃)으로 나눌 수 있다. 깬돌화살촉은 흑요석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 가장 많은데 형태상 크게 무경촉(無莖鏃), 유경촉(有莖鏃), 그 중간형으로서 버들잎형(柳葉形鏃)으로 나눌 수 있다. 3가지 형태 중 무경촉이 압도적으로 많이 보인다. 간돌화살촉은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는 것으로서 형태상 크게 무경촉(無莖鏃), 유경촉(有莖鏃)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특징은 촉신(鏃身)의 가로자름면(橫斷面)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는 평육각형(平六角形)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고, 청동기시대는 양익유경촉(兩翼有莖鏃)과 유엽형(柳葉形), 삼릉형(三菱形), 삼각형(三角形) 등이 있다.

베는 무기에는 간돌검(磨製石劍), 청동단검(靑銅短劍), 청동도자(靑銅刀子)가 있다. 간돌검은 주로 점판암을 정교하게 갈아서 만든 단검으로서 한반도에서 청동야금술이 발달하기 이전까지 찌르는 무기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형태는 이미 제작되어 쓰인 돌화살촉 또는 돌창(石槍)의 형식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에 와서 발전한 무기이고 주로 집자리(住居址), 고인돌(支石墓), 돌널무덤(石棺墓) 등에서 출토된다. 종류는 크게 유경식석검(有莖式石劍), 유병식석검(有柄式石劍)으로 나눌 수 있는데 찔렀다가 빼기 쉽게 하기 위해 검몸에 피홈이 있는 것과 피홈이 없는 형태가 있다.

청동단검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것이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인데 형태가 비파처럼 날의 아래가 둥글게 생겼으므로 이름지어진 것이고 요령식동검, 만주식동검 등으로 불리어 왔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은 비파형동검을 조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검몸의 한가운데에 등대가 섰고, 중앙부에는 결입부(抉入部)가 있다. 세형동검의 재료는 대개 백동질이며 굳고 예리하며 검코는 납으로 만든 것이 많다. 청동도자(靑銅刀子)는 칼몸이 날쪽으로 약간 굽은 작은 외날칼이다. 청동도자는 청동단추(銅泡)와 더불어 청동기문화 초기의 유물로서 귀중한 것인데 평남 개천 용흥리, 평북 용천 신암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치는 무기에는 돌도끼(石斧), 청동도끼(銅斧)가 있다. 돌도끼는 도끼모양을 한 석기로서 생산도구로 쓰인 것이기도 하지만 적과 싸울 때에는 육박격투의 무기로 쓰였으며, 제작기술에 따라 깬돌도끼(打製石斧)와 간돌도끼(磨製石斧)로 나눌 수 있다. 간돌도끼는 형태를 기준으로 편평형(扁平形), 세장형(細長形), 원통형(圓筒形), 주상형(柱狀形)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청동도끼는 형태에 따라 크게 두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선형청동공부(扇形靑銅銎斧)인데 부채모양의 주머니(銎部) 도끼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평면이 구형(矩形)에 가까운 형식이며 주머니 부분보다 날 부분이 약간 넓다.

찌르는 무기에는 돌창(石槍), 동투겁창(銅矛)이 있다. 석창은 선사시대에 있어서 가장 위력 있는 무기 중 하나였는데 형태에서도 유경식, 무경식 및 중간형인 유엽형 등이 있어 돌화살촉을 확대시킨 감을 준다. 깬돌창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대부분 흑요석을 쪼아서 다듬은 것으로 형태는 양면을 정밀하게 쪼아서 고기 비늘처럼 다듬었으며 몸체는 얇고 양쪽의 날은 예리하다. 간돌창은 점판암을 아주 정교하게 갈아서 만든 뿌리 없는 것(無莖式)이다. 동투겁창(銅矛)은 신석기시대의 돌창을 위시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나타난 무기로서 만들기 쉽고 던진다든가 손에 쥐고 적을 죽이는데 편리하였으므로 육박전(肉迫戰)에서의 기본 무기로 쓰여왔다. 동투겁창은 끝은 창대를 꽂는 주머니 부분(袋部)과 날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주머니 부분은 긴 원추형으로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들어 날 부분에 이르러 등대로 되어 있다.

걸어 당기는 무기에는 동꺾창(銅戈)이 있다. 동꺾창은 적의 목, 팔, 다리 같은 데를 걸어서 잡아당김으로서 적을 살상하는 무기이다. 동과는 주로 세형동검과 쌍을 이루며 출토되는데 형태는 세형동검과 비슷하나 꺾창몸과 뿌리 부분(內)의 경계에 곧은 턱이 있으며 그것이 꺾창몸과 약간 경사지게 되어 있고 턱 바로 위에 2개의 구멍이 나란히 뚫려 있다. 세형동검보다 짧으며 너비가 넓다. 2개의 구멍은 꺾창자루의 끝 부분을 턱에 맞대서 끈으로 감아 매기 위한 것이다.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무기류는 용도에 따라 쏘는 무기, 베는 무기, 치는 무기, 찌르는 무기, 걸어 당기는 무기, 방어용 무기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재료는 철을 이용하였다. 쏘는 무기에는 활과 화살, 쇠뇌(弩)가 있다. 그 유물로는 화살촉과 쇠뇌의 부속 금구인 발사장치(牙)만 남아 있고 활이나 화살대, 쇠뇌의 나무 유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삼국시대의 활은 고분에서 드러난 단편적인 유물과 고구려의 벽화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활은 무용총의 수렵도, 각저총, 안악 1·3호분 등에서 알 수 있는데 만궁(彎弓)이고 전체 길이가 80㎝ 내외의 단궁(短弓)임을 알 수 있다. 벽화의 활 그림은 활고자(시위를 잡아 매는 활채의 양쪽 부분 ; 미)가 모두 밖으로 현저히 휘었으며 활채는 5개의 절로 구분되어 있고 절 사이에는 마디가 있다. 양쪽의 활고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무엇인가를 덧씌워서 활의 강도와 탄력을 보강하였다.

또한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 활은 맥궁(貊弓), 단궁(檀弓), 경궁(勁弓), 각궁(角弓) 등으로 명칭이 다르나 그 형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 본기 제2모본왕 4년조에 기록되어 있는 만궁으로 볼 수 있다. 백제 활은 나주군 신촌리 9호분 을(乙)옹관의 출토품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활채의 정탈목이 휘어진 모양으로 보아 만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야 활은 양산 부부총, 총함안 고분, 고령 지산동 주산 39호분 등의 활고자 출토를 근거로 직궁(直弓)으로 보고 있다. 신라 활은 금관총에서 드러난 활고자 3개와 수렵문전을 통해서 만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의 쇠화살촉을 살펴보면, 고구려 쇠화살촉은 형태에 따라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넓적촉, 뾰족촉, 변형 두 나래촉(變形兩翼鏃)이 있다. 고구려의 쇠화살촉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도끼날형(斧刃形)인데 방어 무장이 약한 적에 대해서는 단번에 큰 상처를 주기 위하여 썼으며 반대로 방어 무장이 견고한 경우는 관통력이 센 뾰족촉을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약수리 벽화고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백제 쇠화살촉은 전모를 잘 알 수 없으나 넓적촉과 뾰족촉으로 구분되는데 도끼날형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가야 쇠화살촉은 고구려보다 더욱 형태가 다양한데 넓적촉에는 도끼날형(斧刃形), 긴 외날칼형(長刀身形), 버들잎형(柳葉形), 삼각형, 두 나래형 등이 있고, 뾰족촉에는 외날칼형, 삼각형, 능형 등이 있다. 특히 창녕 교동 4호분 출토품은 유일한 삼익촉(三翼鏃)이다. 신라 쇠화살촉 역시 넓적촉과 뾰족촉 2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밖에도 소리 활촉이 고구려 남파동 적석총, 가야 양산 부부총, 신라 경주 황오리 4호분 등에서 출토되었다. 소리 화살촉은 화살촉에 구멍난 둥근 기구를 장치함으로서 화살이 날아갈 때 공기작용에 의하여 일종의 울림소리를 내게 한 것이다. 이것은 넓은 들에서 사냥을 할 때에 서로 신호를 하기 위하여 쓴 것이며 더 중요하게는 짐승이나 싸우는 적들을 두렵게 할 때, 지휘관이 공격할 곳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쇠뇌(弩)는 활보다 화살이 날아가는 힘이 강한 무기로서 길쭉한 나무틀과 굽은 만궁으로 이루어졌다. 삼국시대 쇠뇌 유물로는 서울 풍납토성 출토품이 알려져 있으며 『성호사설(星湖僿說)』 유선(類選) 권(卷) 오하(五下)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진흥왕 19년조의 문헌기록을 통해 고구려와 신라에 쇠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베는 무기에는 철검(鐵劍), 철도(鐵刀) 등이 있다. 검(劍)과 도(刀)는 손에 쥐고 적을 베거나 찌르는데 쓰이는 무기로서 쌍날칼(劍)과 외날칼(刀)이 있는데 장단에 따라 대검(大劍), 대도(大刀), 짧은 것을 단검(短劍), 단도(短刀)라고 한다. 그리고 손칼은 도자(刀子)라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시대의 쌍날칼과 외날칼의 유물에 있어 압도적인 것은 외날칼(刀)이다. 외날칼 중에서 일상 생활용품으로도 사용되는 손칼(刀子)과 30㎝ 정도의 짧은 칼을 제외하면 삼국시대의 유물의 대부분은 긴 외날칼(大刀)이다.

치는 무기에는 쇠도끼(鐵斧)를 들 수 있다. 쇠도끼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면 공구로서 의미가 크지만 선사시대는 물론이고 상당한 기간에 걸쳐 무기로서 성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내려치는 무기인 대도와 마찬가지로 육박전(肉迫戰)을 할 때 중요하게 쓰이는 무기이다. 쇠도끼가 무기였음을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백제의 병사가 신라의 장군 눌최(訥催)를 도끼로 쳐죽였다”라는 기사에서도 알 수 있다. 벽화고분과 고분 출토의 쇠도끼에 있어 그 출토 정황으로 보아 주머니 도끼(鑿斧)가 전투용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양쪽으로 철판을 오므려서 원통형의 주머니 부분을 만든 유견쇠도끼(有肩鐵斧)가 있는데 몸이 날 부분쪽으로 넓어진 형식이다. 이런 형식의 쇠도끼는 가야나 신라의 고분에서 흔하게 출토되는 것이다.

찌르는 무기에는 끌창(鑿形矛), 쇠창(鐵矛)이 있다. 끌창은 주머니 부분을 창과 똑같이 만든 것으로 보아 거기에 창대와 같은 긴 대를 꽂아서 창과 같이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끌창의 끝부분을 뾰쪽하지 않고 넓적하게 만든 것은 상처를 크게 주려는데 목적이 있다. 종래에는 끌이라 하여 공구 혹은 농구로 보았으나 강서군 대성리 8호 움무덤, 부산시 동래구 오륜대 3호분 등에서 따로 출토되지 않고 쇠투겁창과 한 쌍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쇠투겁창과 함께 무기로 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가야의 의성 대리 고분에서 피장자의 왼쪽 허리 부근에서 둥근고리자루큰칼과 겹쳐서 출토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것은 원통형의 목에 창몸이 넓적하고 장방형에 가까운 방형을 이루고 있다. 쇠창은 삼국시대에 가장 일반적이며 기본적인 무기로서 출토양도 많고 많은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고구려 쇠창은 유물과 더불어 벽화고분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넓적창, 뾰족창, 2가지창 등이 있고 기병만이 쓰는 긴 창과 보병의 주요 무기인 짧은 창 등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백제 쇠창은 크게 3종류로 나뉜다. 즉 방추형(方錐形), 검신형(劍身形), 3가지창 등이다. 3가지 창은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현재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9호분 을(乙)옹관 출토품이 있다. 가야 창은 형태에 따라 원추형, 검신형, 창몸은 검신형이나 주머니 부분에 코()가 있는 것, 2가지창(二枝槍) 및 3가지창(三枝槍)으로 나누어진다. 신라 창은 형태에 따라 방추형(方錐形), 검신형, 창몸은 검신형이나 주머니 부분에 코가 있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걸어 당기는 무기는 쇠낫(鐵鎌), 가지극, 갈고리가 있다. 쇠낫은 일반적으로 농구로 여겨지나 삼국시대에서는 걸어 당기는 무기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기로 쓰인 쇠낫은 낫몸이 날을 낸 양쪽으로 약간 휘었고 끝부분으로 가면서 좁아졌으며 자루쪽은 끝을 구부려서 거의 직각이 되게 나무 사이에 끼워 쓰게 편리하게끔 되어 있어 오늘날 쓰고 있는 낫 형태와는 다르다. 가지극은 당시의 환경과 전투 방식에 적합한 무기를 독창적으로 만들어내어 쓴 것이다. 가지극 몸의 한쪽에는 자루를 끼울 수 있도록 통형의 주머니를 만들고 장방형의 몸에는 가지가 양쪽으로 삐쭉 나오게 한 이상한 무기라는 의미에서 이형무기(異形武器) 또는 가시 같은 것이 있는 무기라는 뜻에서 유극이형무기(有棘異形武器) 등으로 불리었다.

가지극은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발견 예가 없으며, 가야·신라에서 성행한 것으로서 일반적이며 기본적인 무기의 하나이다. 또한 보병에 대해서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며 기병과 싸우는데 유리한 무기였을 것이다. 즉 말에 탄 무사를 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인데 가지극은 바로 이러할 때 가장 적절하게 쓰이는 무기이다. 갈고리는 얼른 보아 무엇을 잡아채려고 하는 독수리의 발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긴 대를 끼워 무엇을 걸어서 끌어당기기 위한 것이다. 갈고리는 주로 고구려에서 쓰인 것으로 가야, 신라의 가지창과 같은 용도인데 걸어 당기는 무기로서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적을 긁어서 큰 상처를 주는 데도 쓰였다.

방어용 무기에는 갑옷(甲), 방패(防牌)가 있다. 공격용 무기의 발전에 따라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방어 수단이 고안됨에 따라 등장하게 되었는데 무기에서 주체를 이루는 것이 전투 복장인 갑옷(甲), 투구(胄)이고, 공격 무기를 피할 수 있는 방패 또한 중요한 방어용 무기이다. 그리고 기병이 탄 말에 씌우거나 입힌 말투구(馬胄)라든가 말갑옷(馬甲)도 방어 무기의 하나이다. 삼국시대의 갑옷은 보병이 주로 입었던 판갑옷(短甲)과 기병이 입은 비늘갑옷(札甲)이 있다. 판갑옷은 장방형의 철판을 쇠못으로 이어 붙인 것이고 비늘갑옷은 수 많은 찰갑(刹甲)편을 꿰어 붙여서 만든 것이다.

한편 갑옷은 고분에서 드러난 유물이라든가 벽화고분 또는 문헌에 의하여 알 수 있는데 고구려·가야·신라·백제의 갑옷은 거의 다 공통적으로 비늘갑옷이었다. 그러나 가야나 고구려 벽화에서 판갑옷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판갑옷과 비늘갑옷이 함께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방패는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없고 안악 3호분의 회랑벽화인 대행렬도에 나타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크게 4가지 형태로서 모두 손방패이다. 첫째, 2개의 판을 합쳐서 만든 듯한 긴 육각형방패가 있다. 둘째, 반원형으로 된 2개의 판을 합쳐 만든 것. 셋째, 앞뒤가 둥글며 1장의 판으로 되고 그 중앙부에 이르면서 안쪽으로 약간 오므라들어 마치 누에고치의 평면형과 비슷한 것. 넷째, 측면에서 보면 굽은 활처럼 생긴 형태이다.

철제 무기류

철제 무기류

참고문헌

  • 新羅와 伽倻의 武器·武具-龍鳳文大刀와 三環頭大刀(趙榮濟, 韓國古代史論叢 3,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년)
  • 고분유물(김기웅, 대원사, 1992년)
  • 三國時代의 武器(김기웅, 韓國文化 15, 서울대 韓國文化硏究所, 1980년)
  • 무기와 화약(김기웅, 교양국사총서 3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년)
  • 고조선의 무기(고고민속 4, 사회과학원출판사, 1967년)
  • 삼국시대 갑옷과 투구(박진욱, 고고민속 2, 사회과학출판사, 196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