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자리

집자리

주거는 인간이 일정한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다. 가옥같은 건축물 뿐만 아니라 동굴과 같은 자연물을 이용한 경우도 포함된다. 인간생활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최소 단위로, 주거는 다양한 자연환경에 대처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기본적인 장이 된다. 자연환경, 문화, 사회구조, 생업의 형태 등에 따라 구조와 형태에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이중 자연환경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집자리는 주거활동이 중지되어 폐기된 상태의 터를 말하는 것으로, 고고학적으로는 움집자리〔竪穴住居址〕, 굴립주건물지(堀立柱建物址), 돌깐집자리〔敷石住居址〕, 동굴집자리〔洞穴遺蹟〕, 바위그늘집자리〔岩陰遺蹟〕 등이 모두 포함된다.

집자리는 폐기된 상태로 출토되기 때문에 그 구조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 잔존 양상들을 통해 대략의 주거형태를 추정할 뿐이다. 집자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중요하므로 매우 신중하고, 계획성 있게 만들어진다. 그 외형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축조방법이나 부속시설에서 나타나는 공간분할과 생활양상 등은 당시 사회를 파악하는 기초자료가 된다. 축조방법은 바닥, 벽, 기둥설치형태, 지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입지나 사회적구조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부속시설은 선반, 출입구, 화덕자리〔爐址〕, 저장구덩이〔貯藏孔〕, 부뚜막, 온돌, 벽도랑〔壁溝〕, 구덩〔竪穴〕, 외부돌출구(外部突出溝)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집자리가 확인되는데, 이동생활로 인한 임시 용도의 집자리 형태가 많다. 본격적인 주거의 등장은 정착생활이 본격화된 신석기시대부터이고, 움집자리, 돌깐집자리, 동굴집자리 등이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는 농경이 발달하고 대규모의 취락이 들어서면서 자연물을 이용한 주거의 형태에서 벗어나 사회구조와 생업의 형태에 맞게 그 주거형태가 변하게 된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움집자리〔竪穴住居址〕와 굴립주건물로 나눌 수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움을 이용한 주거형태이다. 굴립주건물은 남아있는 자료가 빈약하여 그 용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주변의 상황을 고려하여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굴립주건물은 대부분 움집자리와 공반되어 출토된다. 그 수도 움집자리에 비해 매우 적고, 배치양상도 일부지역에 모여 있거나 움집자리 군집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주거가 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주로 저장시설인 창고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의 시기를 토기의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구분하면, 전기, 중기, 후기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각 시기별 대표적인 토기를 살펴보면, 전기는 새김덧띠무늬토기〔刻目突帶文土器〕,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등이며, 중기는 외반구연의 송국리식토기(松菊里式土器), 후기는 원형덧띠토기〔圓形粘土帶土器〕와 삼각형덧띠토기〔三角形粘上帶土器〕 등이다. 토기의 변천과정과 더불어 집자리의 변화양상도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는 평면형태가 세장방형과 장방형이 주를 이루며 규모는 세장방형 집자리의 면적이 50㎡ 이상, 장방형의 면적이 20∼30㎡ 내외로 대형이다.

내부에는 화덕자리, 저장구덩이, 벽도랑 등의 시설이 확인되며, 배치양상으로 보아 공간분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덕자리는 집자리 중심에 일렬로 다수가 배치되어 있으며, 구덩식〔竪穴式〕, 돌두름식〔圍石式〕, 무시설식(無施設式) 등 다양한 형태가 나타난다. 저장구덩이는 집자리의 모서리 부분에 주로 배치되며, 여러 기가 모여 있다. 일부는 대형의 토기를 저장구덩이 내에 묻어 저장시설로 이용하였다. 벽도랑 시설은 벽면을 따라 일부 면에 확인되나 네 벽면 모두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기둥구멍〔柱穴〕은 집자리의 중심과 벽을 따라 일정하게 배치되며, 일부 집자리에서는 주춧돌〔礎石〕도 확인된다.

중기에는 평면형태가 원형과 (장)방형이 주를 이루며, 규모는 원형 집자리가 20㎡ 내외, 장방형이 20∼30㎡, 방형이 10㎡ 내외로 전기에 비해 작아진다. 내부시설은 중앙에 타원형구덩이〔娥圓形竪穴〕와 양쪽에 기둥구멍이 확인되는 소위 송국리형집자리와 화덕자리, 벽도랑, 외부돌출구 등이 확인되는 집자리 등으로 구분된다. 송국리형집자리는 충청, 전라, 경남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타원형구덩이와 양 기둥구멍을 중심으로 한 평면형태이나 이들의 배치 및 내부시설 등은 지역마다 차이를 보인다. 송국리형집자리의 특징인 타원형구덩이의 기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작업구덩이, 저장구덩이, 화덕자리, 집수구(集水溝)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중 작업구덩이의 기능은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 확인된 옥 공방지(工房址)를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집자리 내부에서는 화덕자리가 확인되지 않는다.

화덕자리와 벽도랑, 외부돌출구가 설치된 집자리는 주로 울산지역을 중심으로 동남해안지역에서 발견되며 평면형태는 (장)방형인데 ‘울산형집자리’로 명명되고 있다. 내부시설인 벽도랑은 제습, 배수시설, 벽을 세우기 위한 기초 홈의 기능을 한 것을 보인다. 벽도랑을 따라 집자리의 외부돌출구가 확인되는데, 대부분이 경사면 아래쪽으로 설치되어 있어 배수와 관련된 시설로 보인다. 화덕자리는 구덩〔竪穴〕의 형태로 1∼2기가 확인되며, 일부는 구덩 둘레에 점토띠를 두른 것도 있다. 또한 울산 연암동 유적에서는 집자리 둘레에 도랑〔周溝〕을 돌린 것도 확인되어 ‘연암동식집자리’로 불린다. 후기는 평면 형태가 (타)원형과 (장)방형이 주를 이루며, 규모는 중기의 집자리와 비슷하다.

후기의 집자리는 깊이가 얕아지며, 기둥구멍의 수가 적고, 내부에서 깬돌〔割石〕이 많이 출토된다. 내부에서는 벽도랑, 화덕자리, 온돌 등의 시설이 확인된다. 이 중 온돌시설은 덧띠토기 시기의 모든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것은 아니며, 현재 일부지역에서 확인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사천 늑도 유적이 있으며, 여기서는 삼각형덧띠토기가 출토되는 집자리에서만 확인되었다. 온돌은 벽을 따라 일부만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동기시대 집자리 형태의 변천과정은 일반적으로 대형의 세장방형, 장방형에서 소형의 (타)원형, (장)방형으로 변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중 장방형 집자리는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채택된 주거형태로, 공간분할이 용이하며 정착사회에 적합한 집자리 형태로 알려져 있다. 집자리의 면적은 점차 축소되는데, 그 원인을 집자리 1기에 거주하는 구성원의 수가 감소하였거나 전기 집자리에 나타난 저장구덩이가 외부로 이동하여 그 공간만큼 집자리가 축소되었다고 보고 있다. 중기 집자리에서는 외부에 저장구덩이를 만들거나 저장가옥을 설치하게 된다. 저장가옥은 여러 기가 모여 있는 집자리 중 1기를 저장시설로 사용하거나 따로 굴립주건물 같은 고상창고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는 전기의 주거패턴과는 다른 것으로,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기의 세장방형 집자리는 30m 내외의 간격을 두고 1기씩 분포하며, 내부의 여러 시설과 공간분할로 보아 여러 세대가 같이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중기로 들어서면서 내부의 저장구덩이는 점차 없어지고, 집자리들이 소규모로 군집을 이루며 밀집된 형태로 배치된다. 소규모로 형성된 집자리들은 5∼10m정도 떨어져 있으며, 이들 군집들은 약 20∼30m 정도 떨어져 분포한다. 후기로 가면 집자리들의 수가 줄어들고 서로 중복되는 양상이 심해진다. 또한 입지적으로도 전기나 중기와는 달리 고지대에 입지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양상들은 쌀농사〔稻作農耕〕이 발달되는 중기에서부터 나타는 것으로 공동체의 조직이 변화하였음을 말해준다. 전기의 대형 집자리 형태에서는 공동거주에 생산과 소비 또한 공동으로 하는 방식이 유행하였으나, 중기에는 몇 기의 집자리가 모여 소규모의 생산단위와 소비단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윤호필)

참고문헌

  • 마을의 고고학(한국고고학회, 1994년)
  • 무문토기시대 주거양식의 변화-충남지방을 중심으로-(이기성,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0년)

동의어

주거지(住居址)

참조어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움집자리